시스템의 관성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 내부의 부조리나 비효율적인 시스템 같은 문제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문제들이 제법 오래되었으며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문제는 뻔한데 왜 바뀌지 않을까?" 하는 답답함과 의문으로 시작해 바뀌기는 글렀다는 회의와 체념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조직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매번 같은 종류의 부조리, 비효율, 불합리, 비상식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조직에 대한 기대감을 무너뜨린다. 왜 조직은 개선, 혁신, 변화를 외치면서도 결국은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시스템의 관성이다. 많은 직장 조직이 부조리나 비효율, 불합리 따위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이나 기존 시스템의 개선을 꾀한다. 조직의 모든 활동은 조직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문제 해결을 위해 시스템에 손을 대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이 안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조직 구성원들은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 만약 새로운 시스템을 활용해서 얻는 효율이 적응을 위한 수고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되면 구성원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 기존 시스템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새로운 시스템이 더 나은 효율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비용을 치르는 대신 기존처럼 문제를 떠안고 가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스템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은 일시적인 비용임에 틀림없으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기존 시스템의 문제를 안고 가는 것보다는 비용이 덜 든다. 적어도 새로운 시스템이 기존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보장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멀리 있는 효율보다 당장 눈 앞의 비용을 더 크다고 여긴다. 새로운 시스템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어차피 문제가 있다면 기존의 익숙한 문제를 안고 가는 것을 택하는 것이 그나마 속편하다. 게다가 새로운 시스템의 문제점은 기존 시스템을 고수하는 저항의 구실이 되기도 한다.
정지한 물체를 움직일 때는 처음에 가장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가속이 붙으면 처음 움직일 때보다는 힘이 덜 든다. 그러다 한창 신나게 움직이고 있는 물체의 진행 방향을 바꾸거나 정지를 시키려고 하면 정지한 물체를 움직이기 위한 만큼이나 큰 힘이 든다. 정지해 있든 움직이고 있든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 때문이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와 비슷하다. 시스템을 시작할 때 큰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시스템을 멈추려고 할 때나 방향을 바꾸려고 할 때도 큰 힘이 든다. 시스템에도 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의 관성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힘과 같다. 어떤 시스템에 익숙해 있다는 것만큼 새로운 시스템의 적용을 어렵게 하는 것은 없다.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조직일수록 시스템의 관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회사'라는 형태의 조직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간에 시스템에 의존하게 마련이며 기업의 성공을 시스템의 덕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반면에 시스템은 그 관성 덕분에 회사가 잘 변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회사는 시스템의 유연성에 대해서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결백한 방관자
조직이 변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조직 구성원들의 방관자 태도다.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의 일은 여러 업무가 구성원 각자의 역할로 분배되어 퍼즐처럼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든다. 서로 물고 물리는 퍼즐처럼 얽혀 있다 보니 업무에 대한 책임 소재 구분이 불명확할 때도 있다. 어떤 부서나 담당 직원의 명백한 과실이라면 모르겠지만 계획이나 일정대로 일을 진행하고서도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그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아리송한 것이 사실이다. (사후 평가를 통해 실패의 원인을 밝히거나 책임과 잘잘못을 따지기야 한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만약에 이렇게 했더라면'이나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을 전제로 한 가정일 뿐이니 완벽한 분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비효율, 부조리, 불합리 따위의 '개선해야 할' 요소들이 쉽게 개선되지 않는 이유도 회사라는 조직의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명백한 각자의 책임 안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는 큰 문제가 없다. 반면 콕 집어서 그 누구의 책임이라고 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여간 머리 아픈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직은 수직적 구조를 가진다. 특정 부서원의 책임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부서장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수직 구조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그 책임은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문제가 해결되면 다행이다. 그런데 비효율이나 불합리, 비상식, 부조리 따위의 요소들은 회사의 전반에 걸쳐있는 분위기인 경우가 많아서 특정 인물에게 책임을 지우기가 쉽지 않은 때가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거나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 구성원은 '결백한 방관자'가 된다. 벌어진 일과는 관계가 없는,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방관자로 자처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비평가나 해설가가 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위태위태하다 했다 내가...", "내가 진작에 안된다고 했잖아. 회의 때 내가 한 말 기억나지?"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죄 없는 방관자로 설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방관자가 되면 문제에 대한 책임은 공중에 떠버린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서지 않겠다는, 외면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조직의 안정감이나 효율보다는 자신의 편안함을 선택한 결과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무마된다. 개선과 변화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은, 문제와 연관이 없다고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몇몇 (지독히 비합리적, 비효율적, 비상식적, 몰상식한) 사람들에 의해 그러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같은 종류의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을 시스템 안에 계속 머물도록 하는 조직은 없다. 사람이 바뀌어도 문제가 여전히 생긴다면 결국 결국 방관자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문제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조직의 변화를 가로막는 요소는 이 두 가지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경영자의 독단적 조직 운영이나 무능력, 게으름과 안일함 같은 것들도 조직을 변화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들 중에서 조직의 관성과 구성원의 방관자 태도를 말한 데는 까닭이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변화를 원하고 바라면서도 자신들로부터 이유를 찾는 데는 인색한 경우가 많다.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도 조직의 일부다. 조직에게 문제가 있다면 조직에 속한 사람들도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은 제외시켜 둔 채 외부에서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면 문제는 영영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문제의 원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평범한 가능성을 염두해야 한다. 그런 열린 생각에서 출발해야 문제 해결의 확률은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