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과 능력의 관계
"어떻게 저런 사람을 안 자르지?"
직장생활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에 하나다. 특히, 유능은 고사하고 평균도 안 되는 능력으로 상사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는 건지 의아해진다. 사장쯤 되는 사람과 혈연이나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기라도 했다면 이해라도 간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도 없이 '롱런'하는 무능력한 상사에게서는 이해의 여지를 찾기가 어렵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면 상사로 있는 자체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 아니겠냐는 답이 돌아온다. 시쳇말로 '고스톱 쳐서 자리를 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스톱을 쳤다기보다는 광만 판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어쩌면 그 무능한 상사는 실제로는 유능한 것일까?
적자생존
흔히 직장을 '적자생존'의 장이라고 한다. 강한 개체가 살아남고 약한 개체는 도태된다. 강하다는 말은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약하다는 것은 무능하다는 의미다. 직장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생존이 인과관계를 맺는다. 능력이 원인이고 생존이 결과다. 능력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생존한다. 반대로 능력 없는 사람은 약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도태된다. 직장도 내부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구조이니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명제가 참으로 여겨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간혹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말이 그 말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함을 증명했다는 얘기다. 운이나 특별한 관계 따위의 요소를 배제한 공정한 경쟁이었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애초부터 강했다는 얘기도 된다. 결과를 놓고 해석하느냐, 원인을 놓고 해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능력이 증명된 (증명할 수 있는)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다는 말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저런 업무처리 능력으로 어떻게 저 자리를 꿰찼을까?"라는 의구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버젓이 책상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때 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가 도태된다는 직장에서 약한(무능력한) 사람이 남아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직장이 적자생존의 장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일까?
번역 오류
적자생존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다. 찰스 다윈의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실제로 이 말은 영국의 철학자 겸 경제학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만들었다. 찰스 다윈은 나중에 이 말을 빌어다 썼을 뿐이다. 적자생존의 의미는 이렇다.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 즉, 환경에 적합하게 적응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생존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잘못된 번역으로 인한 오해다. 적자생존은 강함이나 약함과 전혀 관계가 없다.
직장이라는 곳에 생존과 도태의 원리가 적용된다면, 적자생존의 원래 뜻을 직장에 대입해볼 수 있다. 그러면 직장이라는 곳에서는 '직장이라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살아남게' 된다. 이 말은 곧 직장에서의 생존이 강함(유능)과 약함(무능)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에 얼마나 적합한가에 달렸다는 얘기다. 의문은 풀렸다. 누가 봐도 무능한 옆 부서 부장님은 지금 이 회사라는 환경에 적합한 사람이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환경의 허락
직장이라는 곳은 이익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곳이다. 그래서 효율과 합리가 최우선이다. 괜히 직급을 나누고 권한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일의 효율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왜 무능력한 사람이 적합하다는 이유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까? 이유는 조직이 무능력한 사람도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환경에 따라서 무능력한 사람이 많이 생존할 수도, 적게 생존할 수도 있다. 무능력한 사람이 많이 생존하는 조직일수록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 조직에서는 조직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능력이나 시스템보다 사내 정치, 아부, 속임수, 기만 따위가 우선한다. 정상적인 직장에서 효율과 합리의 결과값을 만들어내는 것은 구성원들의 능력이다. 그들의 능력이 클수록 결과도 좋아지게 되므로 능력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구성원 당사자들도 생존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더 키우고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내 정치나 아부, 속임수 같은 비생산적 요소들이 생존에 더 많이 기여하는 환경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능력이 없어도 그만이고 능력이 있어도 굳이 그 능력을 펼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런 환경에서 생존한 구성원의 능력을 논하는 것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어떤 조직도 완벽할 수는 없다. 아무리 효율과 합리를 강조하는 조직에서도 무임승차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다면 능력과 관련 없는 요소들이 생존을 좌우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직을 제어하는 시스템은 합리적인지 확인해야 한다. 직장이라는 조직 자체도 적자생존의 대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혹독한 시장의 경쟁에서 생존하려면 조직은 무엇에 적합해야 할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 일은 능력을 인정받은 윗분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