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까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마치 엄마가 “집안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해라!”라고 했을 때와 비슷하다.
처음엔 ‘네!’ 하고 대답했지만, 막상 시작해보면 이게 어디까지가 끝인지, 먼지가 끝인지, 내 인생이 끝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청소… 아니, 복음 전파에 열정을 쏟았다.
덕분에 우리도 동쪽 끝, 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 “기쁜 소식”을 듣게 됐다.
하지만, 이 열정의 역사는 가끔 ‘이게 정말 기쁜 소식 맞나?’ 싶은 뒷이야기도 남겼다.
“말이 많으면 예수쟁이”
세상에, 말이 많으면 수다쟁이, 말이 많으면 예수쟁이란다.
이쯤 되면, ‘수다쟁이’와 ‘예수쟁이’의 차이가 뭔지 헷갈린다.
예수쟁이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
첫째, 머릿속에 복잡한 이데올로기가 가득해서 그렇다.
둘째, 말만 많고 실천은 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결국,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다.
말과 행동이 일치했고, 머릿속이 단순했고, 혼이 깨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을 증언하는가?”
예수님의 ‘사이다’ 발언 모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한 사람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헤매다가, 결국 자기보다 더한 지옥의 자식을 만든다!”고 하셨다.
이쯤 되면, ‘복음 전파’가 ‘지옥 시민 양성 프로젝트’로 오해받을 만하다.
또, “너희는 천국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까지 막는다!”
이쯤 되면, 교회가 천국의 문지기인지, 빵집의 문지기인지 헷갈린다.
사도 바울도 한마디 거든다.
“너희들 때문에 만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다!”
이쯤 되면, ‘예수쟁이’란 별명이 왜 생겼는지 알 만하다.
증언이란 무엇인가?
밤하늘의 별은 ‘영원’을, 들꽃은 ‘아름다움’을, 폭군은 ‘욕심과 잔인함’을 증언한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증언을 한다.
우리 크리스천은 “나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진리가 뭐냐고?
수학적 진리, 사회적 진리, 경제적 진리… 온갖 진리가 있지만, 예수님이 증언한 진리는 “불을 통과해도 남는 금 같은 진리”, 즉 죄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말 없는 힘, 그리고 유쾌한 침묵.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다.
눈먼 자가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직접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눈이 먼 자요, 불구자요, 가난하고 더러운 자이니, 굳이 체험학습을 할 필요도 없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다.
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증언이다.
그래서 나는 ‘태양은 말이 없다’는 말이 좋다.
태양은 말없이 만물을 키운다.
진정한 증언은 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다, 지자(知者)는 말이 없다, 화자(和者)는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죽음 자체가 증언이다.
예수님도 임종 때엔 기적 대신 죽음으로 죄와 사랑을 증언했다.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입이 무거워진다.
부모님의 삶을 처음 알게 된 자식처럼, 깊은 깨달음은 수다를 멈추게 한다.
평화로운 사람은 굳이 말이 필요 없다.
가을바람처럼, 조용히 곁에 머무는 존재가 된다.
이제 우리는 2,000년 전 갈릴리 사람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의 ‘땅끝’에 서 있는 존재다.
세상을 향해 ‘땅끝까지’ 나아가겠다는 야심 대신, 각자가 마지막 복음의 수신자라는 겸손함으로,
죽고, 웃으며, 태양처럼 타오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알처럼,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
말이 많아 ‘예수쟁이’ 소리 듣지 않으려면, 말 없는 힘, 말 없는 웃음, 말 없는 평화, 그리고 말 없는 열정으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유쾌한 증언자’가 되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