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참 묘한 존재다. 태어나서 이름을 얻고, 관계를 맺고, 물건을 만들고, 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멈춰 선다. 그런데 이 질문, 생각보다 답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모두 ‘생겨난 사람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생겼고, 그 위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또 만나서 생겼다. 이쯤 되면 인생은 거대한 가족 연대기의 부산물 같다.
그런데 이 생겨난 인간은 정작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요즘은 “내가 로그인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더 현실적이다. 존재의 확인은 이제 생각보다 계정 인증에 가까워졌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존재’로 파악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지구에 뿌리내리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을 “왔다가 가는 존재”로 이해했다. 그는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보았고, 그 여정의 앞과 뒤를 환히 알았다. 존재가 아니라 ‘흐름’으로 자신을 정의한 것이다. 마치 바람처럼, 물처럼, 왔다가 가는 것.
이런 관점은 심리학적으로도 흥미롭다. 인간은 안정된 정체성을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바뀌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그러니 ‘나는 존재한다’는 말보다 ‘나는 흐른다’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세상은 경쟁과 소비로 가득하다. 나 먹기 바쁘고,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미움이 생존 전략처럼 착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좀 손해를 봐도 괜찮다”, “누명을 써도 보복하지 말라”라고 했다.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했다. 이쯤 되면 인간이라기보다 거의 인간 초월자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런 사랑은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의 영역이다. 손해를 감수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중심성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는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보라고 했고, 눈치만 보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라고 했다.
말은 힘이 있다. 웅변도 있고, 시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나무 가지 하나 흔들 수 없다. 그런데 풍랑을 잠재우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병든 마음을 치유한 말이 있었다. 그 말은 아무런 이득도 보지 않았기에 더욱 신비로웠다. 사람들은 그 말을 태초의 말씀과 흡사하다고 느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도구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삶의 방향을 바꾼다. 말이 몸을 입고 실천이 될 때, 그것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된다.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곧 임신할 것이다.” 당시 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그녀의 임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용기를 믿는다. 명예를 덜고 순종한 그 자세를 믿는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첫 비극, 하와의 선택과 정반대다. 하와는 죽음을 각오하고 불순종했지만, 이 여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저항할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그 선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두 가지는 이렇다.
1. 죽음과 명예를 덜고 순종하는 자세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고 싶다면, 두려움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삶의 깊은 체험이 가능하다.
2. 존재가 아니라 여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우리는 존재로서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니라, 왔다가 가는 여정의 일부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사랑에 밀려 삶의 모든 계획을 시도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인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