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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May 12. 2019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어른들을 보며.

배척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 아이들.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그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일상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고민해야 하는 일이 많은 그런 삶인지라... 스트레스가 더 쌓이기 참 쉬운 환경일 수 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환경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새로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늘 스스로의 역할과 존재 이유를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증명해야 하는 사회적인 위치. 


그런데, 작은 아이와 함께 이사한 이 새로운 나라에서 [나 개인]의 행복 지수는 별도로 보더라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인 우리]와 [아이]의 행복지수는 더 높아졌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나 역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 새로운 나라에서 1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아이와 함께 만난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일상 속 어른들의 면면을 돌아보며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의 어른들


 우선, 생활 속에서 늘 아이들을 곁에 두고 대하는 경우가 많은 분들을 먼저 돌아보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유상으로 돈을 받고 아이들을 대하는 경우 친절 역시 일종의 "서비스"로 간주될 수 있으니, "일"이 아닌 형태로 "무료"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어른들의 경우가 가장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적절한 예로... 맨해튼의 거의 모든 미술관이나 전시실, 박물관 등에 빠짐없이 있는 무료 가족/어린이 대상 수업이나 공간을 이끌고 있는 분들의 경우.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와 같은 개념으로 참여하고 계셔서 바로 이런 분들이 주로 관찰해 보았다.


먼저, 가장 최근에 다녀온 루빈스 뮤지엄의 [Sunday Family Workshop] 속의 어드바이저들을 되돌아보았다.

매주 일요일 1시~4시에 진행되는 이 워크숍은, 참가 자체가 무료인 것은 해당 시간에 방문하는 "가족들"에게는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이 날 우리가 참여했을 때, 약 20~30 가족의 액티비티를 이끌어 주던 어드바이저 분들은 '아티스트 1명 (실제, 현재 활동 중인 예술가로, 해당 월의 패밀리 액티비티 테마를 담당한 사람) + 자원봉사자 2명 + 인턴 2명(주로, 대학생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패밀리 아트 워크숍에 참여 중인 아이들과 부모들. 서서 돌아다니고 있는 분들이 도움을 주시는 아티스트와 자원봉사자분들이다.
아이들 사이를 오가다가 질문에 답해주기도 하고, 활동 시작 전에 대략적으로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 좋을지 설명해주시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아이에게는 모두가 친절한 미국이지만, 일반적인 어른들에 비해서도 조금 더 아이들의 시선에 맞추어 다가가고 아이들의 활동을 도와주는 것이 익숙하신 분들. 이 분들의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늘 내 눈길을 끌었다. 아이와 함께 참여하며, 이 분들의 역할과 행동을 면밀히 보다 보니... 몇 가지 배울만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활동 속, 어른의 역할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활동 진행을 이끌어간다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조력자"의 역할과

난관에 부딪히는 아이들이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응원자"의 역할이 이분들의 가장 큰 활동 이유! 

그 어떤 과정에도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토대로 지시와 같은 디렉팅이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적다는 점이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로 느껴졌다. 또한 우리가 "어린이"라 칭하는 "작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 늘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행동과 대화의 모습들.


아이들과 단체로 함께 하는 활동 속에 존재하는 어른들(어드바이저)과 아이들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1) 우선 이 어드바이저들이, 아이들에게 모두와 함께 하는 공간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 등에 대해서 기본적인 가이드를 공유해준다.  

: 물론, 함께 온 부모도 함께 듣는다. 하지만, 설명의 대상은 늘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눈을 보고, 아이들의 질문을 들어가며 아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다. 같이 간 보호자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참여의 "주체"인 아이들에게 포커스가 된 설명들.

                                        

2) 필요한 재료를 일일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며 준비해 준다.

: 어떤 재료도 그냥 건네주는 경우는 없다. 어떤 색을 좋아하니? 어떤 실이 필요할까? 이런 재료 써봤니? 등등 아주 사소한 질문이라도 꼭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본다.  

비슷한 케이스로, 소아과에서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에게 간호사가 잘했다며 건네는 스티커나 사탕도, 일방적으로 쥐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이가 원하는 색상과 모양을 물어보고, 직접 고르도록 유도한다. 

- 여담이지만... 이 곳에서 "Au Pair(오 페어: 유럽에서 온, 입주 가정부를 일컫는 말)"로 일하고 있는 콜롬비아에서 온 친구에게, 네 눈에는 미국인들의 아이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물어봤던 적이 있다. 이 때도 가장 먼저 나왔던 답이 "미국인들은 아이들에게 참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 같아. 아주 사소한 것 까지 꼭 아이들한테 물어보고 선택할 수 있게 하더라고" 였던 것. 한국에서 온내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눈에도 똑같이 느껴지는 모습인 듯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아주 작은 차이지만, 

이 작은 질문에 아이들은 '나 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배워간다고, 이 곳의 어른들은 매우 굳게 믿는다. 그러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에서 아이들을 향한 수많은 질문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그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이 시작되면...

3) 아이들 주변을 맴돌며 지속적으로 필요한 재료가 없는지 살피고, 

    조용히 이를 채워주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간다.

4) 동시에 아이들의 행동을 잘 관찰한 뒤, 

   경우 1->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바로 다가가 아이들이 원하는 형태의 도움을 주고

   경우 2->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거나 짜증을 내는 아이들에게는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는지를 아이가 관찰할 수 있는 거리에서 조용히 시연을 통해서 보여주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 경우 머릿속에 그리는 모양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거나...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경우에 바로 이 어른들의 가장 주목할만한 대응 방식을 보게 된 것 같다. 아이가 울고 짜증 내기 시작하면.. 과거의 나는, 보통  아이가 원하는 걸 물어본 뒤에 내가 아이 대신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편이 훨씬 빠르고 아이의 칭얼거림도 빨리 가라앉힐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분들의 경우 같은 상황에서 아이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져 원하는 방향을 아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뒤, 아이가 원하는 그대로를 구현해주기보다는  가능한 방향의 예시를 선보여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게 이끌어준다. 그리고, 아이가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 준다. 시간도 더 걸리고, 많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더 힘들 수도 있는 방법인데, 곁에서 엄마인 내가 보기에도 '참 참을성 있다' 싶을 정도인 경우가 많아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는 것일까 궁금해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반응과 모습이 한국과 많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차이의 원인은, 

아이가 직접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던 것.


아이의 답을 아이가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그 시간과, 답을 주지 않고 아이가 사고할 방식의 힌트 정도만 알려주는 방식 안에서 아이는 아이는 "엄마가, 또는 선생님이 만들어준 작품"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완성하는 경험을 무수히 반복하고 경험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설프더라도, 어른의 눈에 어떤 내용인지 알기 힘들더라도, 아이의 의사가 오롯이 반영된 순도 100%의 아트워크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는 그래서인 듯하다. 

찰흙 만들기 예시를 보여주어 이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하는 "공원 크래프트 아트 액티비티" 지원 중인 자원봉사자

공원에서 큰 종이로 망토(cape) 만들기 클래스가 있던 날. 자원봉사자가 샘플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돌아다니며 주변을 지나는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었다. 동시에, 실제 두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만드는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는 효과도!

이렇게 부모와 함께 또는 아이만 따로 참여할 수 있는 유사한 내용을 진행하는 공간은 한국에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수업의 대상이 되는 아이들을 [주체]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보호자의 손을 빌려야만 하는 [불온전한 존재]로 바라보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도 사실. 물론, 연령이 어려질수록 보호자의 조력이 필요한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활동을 도와주는 어드바이저나 강사들의 대부분의 설명이 부모를 향하고,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지시도 바로 부모를 향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아이가 어렸던 때는, 아이의 수업인지 내 수업인지 가늠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으니. 

그런데, 이곳에서 내가 보는 아주 많은 경우, 강사들이나 어드바이저들이 부르고 설명하는 대상은 언제나 '아이'들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말도 안 통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연령의 아이들 역시 의사를 가진 "인격체"로 보고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것을 참 많이 보게 된다. 당연히 그러다 보면, 콘텐츠 역시 그 연령대의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으로 더 변화하게 되는 듯하다. 

                                                       


생활 속 곳곳의 어른들이 보내주는 따뜻한 시선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에 주로 있는 어른들은, 전문적으로 트레이닝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어른들의 아이들을 향한 모습을 보며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느꼈던 큰 차이는. 


[아이들을 향한 호칭]과 [표정]이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박물관 내의 프로그램 진행자, 학교 선생님, 방과 후 학원의 코치들, 소아과의 간호사 선생님, 버스 운전기사, 아파트의 도어맨, 길을 가다 아이와 마주한 어른 등...


일상 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가족이나 지인이 아닌 

순도 100%의 타인으로의 어른이 아이들에게 보이는 반응.

이 어른들 중 많은 경우가 어느 상황에서든, 아이가 어른을 부르거나 도움을 청한다면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한다. 


Yes, sweetheart( 또는 Friends).

How can I help you?

애인 사이에나 쓸 법한 표현 정도로만 느껴졌던 sweetheart라는 표현이, 아이들을 향해서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어른들. 나의 아이, 나의 조카, 내 친구의 아이가 아니라 '처음 만나는 아이'에게도 전해지는 사랑스러운 호칭과 따뜻한 인사와 시선. 


기차 안에서 우는 아이를, 한 번쯤 더 달래주려 얼러주고 지나가는 어른들.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먼저 오늘은 어땠는지 안부를 묻는 어른들.

유모차를 끌고 탄 지하철에서 자리를 내어주는 어른들.

낯 모르는 아이가 한 질문에도 성심을 다해 답해주는 어른들.

아이라서 한참 걸릴 수밖에 없는 계단 오르기나, 문 열고 나가기, 버스에 오르기, 지하철 타기... 에도 짜증 내지 않고 웃으며 지켜봐 주는 어른들.

길가에 서있다가도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경찰관 아저씨.

늘 웃으며 아이들이 즐거워할 만한 질문을 던지는 

소아과 간호사, 의사 선생님들.


부모인 나조차 내 아이가 부를 때, 저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고 있나 다시 생각하게 될 정도로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어른들을 보다 보니, 바로 그 곁에서 더 신나고 즐거운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모]인 나에게 있어서 지난 1년은, 이 사회에서 "아이"란 이렇게 작은 사람으로 반드시 존중받아야 할 대상인 동시에, 이렇게나 사랑받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새로이 깨닫게 되는 매일의 반복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 아이와 함께 있는 나 역시 이 각박한 도시 속에서도 편안하고, 배려받는 느낌으로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많은 가정들이 아이를 둘, 셋.. 많게는 넷까지 낳아서 키울 수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이유. 

                                      

오늘도 아이와 여기저기를 오가던 하루 중.

이 곳의 낯선 어른이 내 아이에게 건네는 칭찬과 따뜻한 말을 두어 번은 들은 것 같다. 

"옷이 참 예쁘구나 아가야"

"너 참 귀엽구나:)"

바로, 횡단보도에 함께 서있던 어른과 지하철 역에서 우리에게 먼저 가라며 길을 비켜준 어른들에게서.

처음에는 ' 진짜 우리 아이가 예뻐서 그런가? 아니면 동양 아이가 이들 눈에는 신기하고 예쁜가?'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들은 특정한 아이의 외형이 예쁘고 귀여워서라기보다는..."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건네는 인사였던 것. 그리고 내가 이런 어른들을 보며 알아가는 동안, 나의 아이는 자주 듣는 칭찬과 격려 속에서 더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하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비단 우리 아이만 그러할까?


내가 이곳에서 보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주변이나 어른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가감 없이 자신감 있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사고의 토대를 더 넓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따뜻함을 지닌 어른들은 이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서 또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애정의 선순환. 지금 한국은 어떨까. 선순환보다는 악순환의 고리 안에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키워드가 먼저 떠오르고, 출산율은 심각해진지 너무 오래고... [노 키즈존]은 개인의 소중한 공간과 시간을 아이를 대동한 사람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권리의 하나로 여겨지는 중인 것만 보아도 말이다. 그래서 악순환의 고리 어딘가를 끊어내고, 아이와 함께라서 더 행복한 어른들, 그리고 그 곁에서 더 행복한 아이들이 더 많아지는 방법을...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오늘도 찾아보고 있는 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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