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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Aug 28. 2019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질문 How old are you

친구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게 된 아이를 돌아보며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곳 놀이터에 처음, 영어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갔었을 때.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고 싶었던 아이가 나에게 본인이 하고 싶은 말 몇 가지를 영어로 물어봤었다.


다른 모든 질문 중,

제일 먼저 알려달라고 했던 말은 이 질문이었다.


"[너는 몇 살이야?]는 영어로 뭐라고 해?"

"응? 아.. 그건 How old are you"

"하우.. 오두.. 아유????"

"응, 그렇게 말하면 친구가 알려줄거야."

워낙 한국에서도 처음 만나는 아이들끼리 자주 주고받는 질문이라 나 역시 아이의 이런 질문이 이상하지 않았다. ' 아,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를 찾고 싶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물론, 나도 놀이터에서 마주치는 비슷한 또래 같은 아이를 보면 제일 먼저 몇 살인지 자연스럽게 묻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상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ABC도 모르는 아이와 함께 열심히 연습한 결과... 그 후 아이는 놀이터에만 가면 다른 아이들을 붙잡고 "하우 오드 아유우~~?"라며 신나게 다른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물론, 숫자로 돌아오는 답을 이해 못하니 질문만 던져두고 전담 통역사인 나를 불러대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왜 한국에서 온 우리 아이에게는 '몇 살인지'가 그토록 중요했을까?


한국에서의 1년의 어린이 집 생활 중 나이별로 나뉜 반에 소속이 되어 생활을 했고, 그 결과 아이의 머릿속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언니 오빠, 나이가 적으면 동생]이라는 확실한 구분이 완벽히 자리가 잡힌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나이에 따라 [놀이] 안에서도 지시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이 나뉘어 있었던 것. 동갑일 경우는 바로 '친구' 그룹으로 분류가 되고, 언니나 오빠들의 경우 그들의 지시를 다소 불만스러워도 따르는 한 편, 반대로 본인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지시를 하고 따르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놀이의 역학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나 역시도 늘 아이를 놀이터에서 지켜보면서 크게 이상하다 생각한 적 없었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아이들 사이의 놀이의 역학관계의 중심 기준이 '나이'였고, 아이 역시도 이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나라에서 놀이터 생활을 시작하는 아이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 찾기 여념이 없던 아이

그 후 네 살 공주님 전담 통역사의 본분을 다하고자, 아이 곁에 붙어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의 대화를 가만히 관찰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묻고 있는 "How old are you?"라는 질문이 이 곳의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주고받지 않는 물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 사이에서 보통 [이름]을 먼저 물어보는데, 오직 한국에서 온 우리 아이만 첫 질문이 [몇 살인지]였던 것. 그리고, 우리 아이는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How old are you(몇 살이니)?"라는 질문에 대해 답 하는 이 곳 아이들의 반응 또한 참 재미있었다. 몇 살 인지 답을 하긴 하지만 , 그게 그 후의 놀이의 방식에 큰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았던 것. 나이가 많다고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도 없고, 나이가 적다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아이도 없었다. 나이가 어려도 대차게 언니들을 끌고 다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꽤 덩치가 커 보이는데도 순하게 동생들의 하자는 이야기 다 들어주며 노는 아이들도 보였다.


한마디로, 나이는 상관없이 그냥 잘 맞으면 신나게 함께 노는 것이 이 곳의 Playground rule이었던 것.


그랬기 때문에 불필요한 나이를 묻기보다는 "What's your name?(이름이 뭐야?)"를 묻는 것이 훨씬 당연한 상황이었고 실제 더 많이 들려왔다. 아이들이 자유로이 어울리는 놀이터뿐만 아니라, 학교 생활 속에서도 커리큘럼 내에 여러 가지 mixed age group activity가 진행되어 나이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서로서로 어울리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지칭하는 방식이 서서히 변화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마일로는 언니 오빠반이야' ' 하퍼는 나보다 어려서 동생반이야'와 같이 아이들의 나이가 본인을 기준으로 많은지 적은 지를 이야기했었는데, 반년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때부터는 그냥 아이들의 이름과 소속반을 이야기할 뿐 나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친구의 나이가 많고 적고는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



나이를 잊고 소통하는 방식은 비단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부르는 방식, 아이들이 친구의 엄마를 부르는 방식은 모두 동일하게 '이름'이었기에 나이에 따른 호칭의 차이라는 것은 실제 생활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


이런 시간과 환경 속에 아이도 나도, 서서히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나 놀이의 방식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것은 놀이터에서 노는데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놀이의 역학 관계는 물론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나이'를 반드시 중요 기준으로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상관없이 이름으로 통용되는 호칭 문화에 대해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라는 것을 이미 들어 익히 알고 있던 나였지만, 실제 마주한 큰 문화의 차이 앞에서 변화하는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름도 아닌 [직급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곳]에 소속되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안 차장'또는 '빈이 엄마'로 보내다가, 나이에 의한 호칭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넘어와 수도 없이 없어진 줄 알았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세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학교 졸업과 더불어 직급이 생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나의 이름'을, 한국이 아닌 미국 땅에서 새로이 형성된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듣게 되자, 어떤 직급이나 역할에 함몰되어 있던 스스로가 조금씩 살아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나이]라는 틀을 넘어서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우선 초면에 나이를 기준으로 암묵적인 위아래를 형성 한 뒤, 어느 정도 친밀하게 되면 내가 '언니,오빠'라고 부르거나, 반대의 경우는 나를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고... 친밀감의 표시인 '언니'라는 호칭이 엮이지 않는 경우는 보통 회사에서 사용하는 호칭이 붙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대리님, 박주임 님, 진 대표님 등등등.


'밥 한 공기를 더 먹어도 어른이다.'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자랐고, 그런 논리가 통용되는 사회를 경험했다 보니 [나이=그 사람의 능력이나 덕망의 깊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래야 '왜 이래야 해?'라는 생각을 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실제 '의견을 나눈다'라는 표현에 가까운 의사소통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을 듣거나' '내 의견을 들려주거나'로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나뉘어 지는 것을 봐도 많이 불편하지 않게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회사에서 윗 사람에게 강하게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고, 반대로 나의 지시에 의구심을 갖고 묻는 부하 직원을 보면 의아했었다. 또한 회사 내에서는 나이가 어린 상사는 나이가 많은 부하직원을 다루는 것이, 업무의 능력과 범위와 상관 없이 불편해 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새로운 사람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 나이를 매우 중요히 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늘상 존재했다. 일이나 업무로 얽히지 않은 단순한 학부형 모임에서도 어린아이 엄마는 모임의 막내 역할을 하고, 나이가 많은 학부형이 모임을 주도하는 경우가 흔한...'나이' 위주의 사회였으니 회사는 어떠했으랴.


그러다 어느 날, 그렇게 암묵적으로 소통의 방식을 규정하는 [나이]에 대한 생각을 덜어내는 사회로 갑자기 왔는데. 모두 처음 만나는 나에게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다음 만남부터는 이름으로 불러주려 노력했지만 나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적으로 매우 친밀해져 나이를 알게 되었어도 '나이'자체가 우리 사이의 대화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었다. 학부모들 사이에도 어떤 아이 부모가 좀 더 젊다, 나이가 좀 더 나이가 있는 편이다... 와 같은 정도의 인지는 있었지만, 그로 인해서 학교 활동에 주도권을 갖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 동등하게 배려받던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 역시 [나이]라는 내용을 제외하고 사람들을 마주하기 시작하자, 좀 더 본질이 들여다 보이기 시작던 것. 또한, 나 역시도 '스스로의 본질'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즉, 나이를 떼어내고서도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 또한 아이들과 소통 할 때에도 언어 자체에 서열이 느껴지지 않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 친구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사회 내의 나이를 기준으로 중요시되는 서열 문화가 얼마나 생각의 범위를 한정 짓게 되는지를 거꾸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잘못된 호칭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며, 과거 한국에서 내가 경험했던 '호칭'의 변화를 시도된 사례들도 되돌아보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2015년 정도였을까.


사내 직원들 간의 호칭을 바꾸는 정책이 여러 회사들에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대부분이 과장, 차장, 부장 등의 직급을 버리고 "님"으로 호칭을 통칭하거나... 외국계에서 보통 사용하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방식이 그것. 사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부르는 이름 하나 바꾼다고 효과가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영어 이름을 쓰는 회사에서도 Dear xxx KJN(XXX 과장님)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한국식 직함의 영어 이니셜화를 쓰는 곳이 있는가 하면 부르는 방식만 변화했을 뿐, '이야기하는 사람'과 '들어야만 하는 사람'의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곳이 태반이었던 것.


문제는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일의 영역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문화의 차이에 있었던 것인데... 그 핵심이 아닌, 부르는 방식만을 도입하는 경우 제대로 안착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 성공적으로 안착을 한 곳도 있었는데... 이런 회사는 대부분 이미 그런 호칭을 도입하기 전에, 이미 유연한 사내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다. 즉, 문화가 기반이 된 후 도입된 호칭의 변화는 결과도 긍정적이었지만, 수평적인 문화가 없는 곳에 도입된 호칭은 결국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가 되었던 것.


비슷한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 서울시내 초중고교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을 없애고  ‘ㅇㅇㅇ님’ 또는 ‘ㅇㅇㅇ선생님’으로 부르는 것을 서울교육 조직문화 혁신방향의 하나로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www.edupress.kr

서양권의 호칭 문화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봐야 할까? 일단 호칭에 대한 변화를 통해서 그 안의 문화를 바꾸겠다는 의도인 것은 알겠으나, 전반적인 수평문화의 선행이 가장 더딘 학교라는 구조 내에서 호칭을 먼저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유효할지 상당히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배우 하정우의 책 중 '언령을 믿으십니까'라는 구절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게 된 구절이 있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걷는 사람 하정우] 중-


단순한 말도 그러할 수 있는데, 하루에 수십번씩 듣는 호칭은 어떠하랴.

그 호칭이 서열이나, 위계관계를 떠나 오롯이 그 사람만을 향할 때 가지는 강한 힘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나 역시도 타인을 대할 때 더욱 호칭에 신경쓰게 되었다. 우리 아이를 대할때도 역시도 이름에 '공주님''귀요미''예쁜이" 같은 긍정적인 별명의 언어를 붙여서 사용하고, 다른 집의 아이들을 부를 때도 성인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려 노력한다. 이름을 모르는 아이의 경우라면?  Kids나 Boy/Gril 보다는....Friends라는 칭호를 사용하려 애쓴다. 결혼한 남동생의 아내에게도 [오라비의 계집]이라는 뜻의 '올케'보다는 가능한 이름을 부르려 노력한다.


너무나 당연했던 "몇살이야?"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입밖으로 나오는 호칭의 변화까지 이어진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내가 아이를, 남편을 존중하고 동등하게 의사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노력은 우리 가정의 성장에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진행 될 것이기에. 그리고 그 노력은 가정을 넘어 사회에서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닿아야 할 것이기에,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멈추어서는 안될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아이들이 '나이'에 대해서 크게 괘념치 않는 상황은 이 곳의 제도적인 부분의 영향도 있다. 미국은 주에 따라서 학교의 학년을 나누는 cut off가 9월 또는 12월로 각기 다르기도 하고, 같은 주에서도 공립이냐 사립이냐에 따라서 이 기준이 또 다르기도 한 까닭에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라도 학년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인 것. 그래서 '학년'으로 선후배를 논한다는 것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의미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미국 역시 불과 20-30년 전에는 선생님이나, 연령이 높은 어른을 지칭할 때는 Mr.000, Mrs, xxx와 같이 성 앞에 미스터 또는 미세스를 붙여 정중히 부르는 방식을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은 이와 같은 호칭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방식을 전체적으로 지양하는 상황. 특히, 타 지역에 비해 가장 진보적인 문화의 뉴욕의 경우,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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