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엄마생각'
다섯 번째 아이,
산아의 이야기.
시금치를 들어 올려 산호의 밥그릇에 얹는 산아가 말한다.
"얼른 이거 먹어."
전투장에서 적군의 창을 걷어내듯 산호가 재빨리 산아의 젓가락을 쳐낸다.
"싫어~! 나 시금치 싫어."
"엄마가 이거 먹으라고 했잖아."
"난 싫다고오~, 엄마! 누나가 자꾸 이거 먹으라고 내 밥그릇에 올려놔!!."
"엄마, 얘가 엄마 말 안 들어!"
툭탁거리는 남매, 산아와 산호를 바라보며 현관에서 분주히 아이들 가방을 챙기던 여신이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 앞으로 모아 손바닥으로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을 꾹꾹 누르는 듯하더니 나직이 신음을 내뱉었다.
"아.. 요놈의 자식들. 또.... 딥 브레쓰.... 하아....."
"... 엄마, 나 다 먹었어요. 양치할게."
아침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여신을 보고, 눈치가 빠른 산아가 재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는 와중에도,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아침상을 앞에 두고 깨작거리며 장난 중인 산호와 씨름 중인 여신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산아는 잠시 후 시간을 확인하고, 현관 앞에 놓여있던 유치원 가방을 먼저 들었다. 그리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마치고는 엄마와 동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24개월도 채 차이가 나지 않는 두 아이를 키우는 일상이 익숙해질 만도 하거늘, 매일 새로운 일로 툭탁거리는 남매를 다루는 일이 좀처럼 쉬워지지 않는 여신이었다. 늘 새벽이면 출근하는 남편인지라, 아침의 등원 전쟁은 늘 오롯이 그녀의 세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첫째 산아를 키우며, 이런 것이 육아라면 열이라도 키우겠다는 생각에 둘째 아이 산호를 낳았다. 그러나 세상은 절대 모든 것을 그리 수월히 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린 엄마가 알기엔 너무 중요한 진실이었을까. 산아를 생각하며 낳은 산호는 여러모로 참 그녀에게 버거운 숙제를 매번 던져주었다. 미운 다섯 살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본질적으로 이해를 하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행동들로 늘 여신을 고민하게 하던 산호였다. 그랬기에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쪽이 둘째, 산호가 되고는 했다 작년부터 둘을 같은 유치원을 보내게 된 뒤로, 아침의 등원 전쟁도 한결 나아졌지만 간혹 행사라도 있으면, 엄마인 여신은 산호를 담당하고 산아는 자리에 없는 아빠 대신 선생님과 파트너가 되고는 했다. 일곱 살의 눈이지만, 마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늘 조용히 어른스러운 산아는 선생님 옆에서도 늘 환하게 웃고 잘 지내서 여신의 위안이자 자랑이 되었다.
현관을 나서 유치원 버스를 타는 곳까지 걸어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한 겨울의 동장군은 10m를 100m처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이 둘을 단단히 입혀 나오느라, 정작 가벼운 플리스 재킷에 슬리퍼만 겨우 신고 나온 여신의 발은 금세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제 곧 도착하는 유치원 버스를 놓치면 출근도 늦게 된다는 사실에 발이 시린 것도 잊고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재촉했다.
"얼른 가자~곧 차 오겠다."
"네-에."
버스가 도착할 곳에 다다르자 그제야 산아가 입을 떼었다.
"엄마. 엄마. 나 얼굴이 따가워요."
"응? 얼굴이?"
오른쪽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산아의 얼굴을 바라보니, 찬 겨울바람에 금세 빨갛게 튼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코, 산아야. 로션... 어머. 로션을 못 발랐네."
이 말에 산아가 아닌 산호가 답한다.
"난 발랐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와 함께 준비한 산호는, 촉촉한 크림으로 찬바람에 드러낼 피부를 중무장한 상태였지만 그런 둘째를 챙기느라 먼저 준비하고 현관에 앉아 있던 한아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여신의 얼굴에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 함께 스쳤다.
"어머.. 이를 어째. 어머, 차가 왔네..."
유치원 이름을 크게 쓴 노란색 봉고차가 아파트 단지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산호랑 산아도 안녕?"
"선생님, 저, 제가 금방 집에 다녀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아.. 어머님, 오래는 어려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세요?"
"제가 금방 돌아올게요! 진짜 잠깐만요!"
채 말이 끝나기 전에 선생님과 버스를 뒤로 하고, 바삐 뛰어간 여신이었다. 모든 걸음이 달리기인 산호 때문에 이사한 1층이었기에 엘리베이타를 탈 필요도 없고, 뛰어간다면 금방인 거리였지만 날이 춥고 다음 정류장에 시간 맞춰 나와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기에 선생님과 버스 기사는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여신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버스에 먼저 올라간 산아와 산호는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다음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유치원에서 가장 큰 아이들은 언제나 버스의 가장 뒷좌석에 배정이 되고 그보다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이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 앉고는 했다. 산아의 자리는 버스 가장 뒷자리, 그리고 산호는 문과 가까운 선생님 옆에 앉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엄마를 기다렸다.
"어쩌죠, 기사님. 저희 가야 할 것 같아요."
가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산아가 당황했다.
"어.. 선생님, 엄마가, 엄마가 온다고 했는데..."
"다음 정류장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우리는 가야 할 것 같아. 엄마가 선생님께 전화드릴게."
버스는 다시 아파트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금세 오겠다고 한 엄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벨트를 하고 앉아서도 작은 몸을 있는 대로 돌리고 뒷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던 산아의 눈에 저 멀리 한 손에는 무언가를 소복이 담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멀리 달아나는 버스를 손으로라도 잡을 듯 손짓하며 여신이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만요~잠시만요, 선생님~"
"선생님! 우리 엄마요! 엄마가 따라와요, 선생님!!"
앞쪽에 앉은 선생님에게 울먹이며 큰 소리로 외친 산아였다.
'끼익'
급히 깜빡이를 켜고 선 버스 뒤로, 붉어진 얼굴로 입김을 뿜어내며 헉헉 거리는 여신이 달려와 섰다.
"하아, 하아... 아니, 우리 산아가 얼굴에 찬바람이.. 헉헉.. 텄는데, 제가 로션을 못 발라줬어요, "
막 이야기가 끝나는 찰나, 버스 가장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산아가 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달려 나왔다.
"엄마. 엄마... 허엉."
"얘가 왜 울고 이래. 자자, 어서 로션 바르고 가자. 선생님, 죄송해요, 잠시만요!"
여신이 분주한 손으로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산아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 자그마한 토마토 같은 얼굴에 한 손에 담아 온 로션을 발라주었다.
"자, 다 되었다. 어서 타!"
"응, 엄마. 엄마, 허그!"
엄마를 놓치기 싫다는 듯 꼭 안는 산아를 품에 넣었던 여신이 얼른 버스에 타라며 산아를 돌려세웠다. 기다려주신 선생님과 버스 기사분께 감사하다 인사를 건넨 여신을 뒤로하고, 버스는 다시 유치원으로 출발했다. 이제야 추위가 느껴지는지 양팔로 스스로를 꼭 껴안은 채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고 서있는 여신의 모습을 산아는 창밖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산아의 나이 일곱, 여신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어린 딸을 키우는 어린 엄마였던 여신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훗 날, 살아가다 너무 지치는 날이면, 슬리퍼를 신고 버스를 쫓아 달리던 그날 여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산아가 몇 번을 다시 일어나는지. 그리고 고작 일곱 살이었던 딸이 얼마나 온 마음으로 엄마를 사랑했는지. 여신은 모두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