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 ‘아이들에 대하여'
여섯 번째 아이, 경호의 이야기.
"새엄마라 밥을 안 싸준다니까."
좀 전까지 큰 목소리로 실랑이하던 경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귀에 대고 속삭이자, 깜짝 놀란 현아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짜... 새엄마야?"
"그래, 너 계모라는 말 알지? 계모. 우리 엄마가 계모야."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아버린 듯 큰 눈과 붉어진 얼굴로 경호를 바라보던 현아는, 그간의 괴로움은 모두 잊어버린 얼굴로 경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 가져간 새 학용품이며, 급식실에 문제가 생겨 임시로 싸가고 있는 도시락까지 자꾸 빼앗아 먹는 경호에게 "너…. 선생님한테 이른다!!"라고 소리친 현아에게 경호가 건넨 이야기는 그만큼 예상밖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전개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방향을 잃은 듯한 현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경호도 현아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던 표정이 되었다.
딸깍. 딸깍.
샤프심을 누르자, 샤프심이 가늘고 뾰족한 샤프의 끝에서 톡 튀어나왔다.
공책 위에 지그시 눌러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샤프심을 부러뜨리고 다시 샤프꼭지를 눌렀다. 딸깍, 딸깍 소리에 맞춰 현아의 앞에 샤프심 조각들이 쌓여갔다.
그날 오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간 현아가 엄마를 보자마자 할 말이 있다며 결연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엄마. 경호 있잖아. 엄마가 새엄마래. 그래서 학교에 준비물도 잘 못 가져오고 밥도 안 못 싸와서 내 도시락을 달라고 하고 그랬나 봐."
"걔가 그러니?"
"응. 오늘 나한테, 너만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이야기했어. 그래서… 엄마, 나 내일 도시락 두 개 싸주면 안 돼?"
"... 경호랑 나누어먹으려고?"
"응. 그러려고. 난 새엄마가 그러면 너무 슬플 것 같아."
"그래, 알았어. 엄마가 2개 싸줄게. 우리 딸 친구 걱정하는구나. 알았어."
대화가 끝나자 방 안으로 들어간 현아는,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놓았던 아끼던 지우개와 펜들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고 만지작 거리며 앉아있었다.
그날 오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간 현아가 엄마를 보자마자 할 말이 있다며 결연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머뭇거리던 현아가 입을 떼었다.
"엄마. 경호 있잖아. 엄마가 새엄마래. 그래서 학교에 준비물도 잘 못 가져오고 밥도 안 못 싸와서 내 도시락을 달라고 하고 그랬나 봐."
"걔가 그러니?"
"응. 오늘 나한테, 너만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이야기했어. 그래서… 엄마, 나 내일 도시락 두 개 싸주면 안 돼?"
"... 경호랑 나누어먹으려고?"
"응. 그러려고. 난 새엄마가 그러면 너무 슬플 것 같아."
"그래, 알았어. 엄마가 2개 싸줄게. 우리 딸 친구 걱정하는구나. 알았어."
대화가 끝나자 방 안으로 들어간 현아는,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놓았던 아끼던 지우개와 펜들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고 만지작 거리며 앉아있었다.
다음날. 경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점심시간이 되자 젓가락만 들고 반 아이들이 싸 온 음식을 사냥하러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급식실 공사로 두어 주를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도시락을 싸 오거나, 학교를 통해 단체 도시락을 주문해서 받고 있는 중이었지만 경호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다. 대신 넉살 좋게 아이들에게 한 입만 달라며 장난인 듯, 장난이 아닌 듯 돌아다니던 경호를 바라보던 현아가 조용히 책가방에서 도시락을 하나 더 꺼내며 경호의 팔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이거 너 먹어."
"어? 이거 뭐야?"
"내가 하나 더 싸왔어. 너... 너 도시락 없다고.."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는 현아의 손 끝을 바라보던 경호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스쳤지만, 이내 다짐이라도 한 듯, 얼굴에 본 적 없는 웃음을 한가득 띄웠다.
"아 진짜? 오예~내일도 주는 거지?!"
반을 누비고 다니며 응당 시끄럽게 굴어야 할 점심시간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밥 먹는 경호가 의아한 반 친구들이었지만, 뭔지 모를 뿌듯함과 경호의 넉살에 웃음꽃이 핀 현아였다
그동안 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짓궂은 장난으로 바로 옆자리의 현아를 괴롭히던 경호였다. 입은 옷을 이상한 캐릭터에 빗대며 놀리기도 하고, 새로운 학용품을 가져가면 먼저 좀 쓰자며 가져가고, 운동장에서 다른 여자친구들과 놀고 있노라면 꼭 한두 번씩 시비를 걸고 달아나던 경호. 선생님에게 이르기도 애매한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었지만, 은근히 받는 스트레스에 [노경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고개를 젓던 일상이었기에 갑자기 공유하게 된 비밀과 도시락으로 생긴 평화는 충분히 소중했다. 그렇게 현아는 급식실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 매일 2개의 도시락을 가지고 등교했다.
하지만, 그렇게 완연해진 줄 알았던 평화는 학부모 상담과 함께 끝이 났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온 현아의 어머니가 현아를 불렀다.
"현아야, 경호.. 엄마가 새엄마라고, 경호가 그랬다고 했지?"
"응. 경호가 그랬어. 옷도 안 사주시고, 밥도 안 싸주시는 게 그래서 그렇다고."
"엄마가 오늘 선생님 만나서, 혹시 학교에서 도와줄 방법이 없나 여쭤봤는데.... 경호 부모님이 친부모님이라고 하시던데...?"
"뭐??? 근데 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진 현아가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한 것은, 화풀이라도 한 듯 엉망이 되어 있는 자신의 책상과 잔뜩 화가 나있는 경호였다.
"야! 너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맞았는지 알아?!!"
"네가.. 네가.. 그랬잖아! 네가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아, 씨.. 거짓말 아니라고!!!!"
차마, 아이들이 다 듣도록 '새엄마'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못하는 현아를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경호는 그 뒤 등장하신 선생님께 불려 가 한참을 교무실에 머물다 돌아왔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인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쩐지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눈치를 살피던 현아는 몇 번이나 말을 걸려 했지만, 경호는 현아 쪽을 돌아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그 뒤 학년 말이 되도록, 경호는 현아를 마치 같은 반이지만 없는 사람처럼 스쳐갔다. 불편한 마음에 몇 번이나 말을 걸어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싶던 현아도 제풀에 지쳐 말을 거둔 날들이 가시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경호를 주려 모아둔 지우개와 연필, 그리고 형광펜이 담긴 봉투도 책상 서랍 속 깊숙이 몸을 숨겼다.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시언아, 물통 가지고 가야지, 그리고 실내화 빨아두었는데 이것도 안 챙겼네!"
입고 나간 옷은 너무 춥지는 않았는지, 새벽부터 공기에 습기가 가득한데 우산을 들려 보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고민하며 신발을 막 신고 나가는 등교하는 아이를 불러 세워 놓고 간 준비물을 손에 들려주었다. 아이의 눈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겨 가지런히 모아 귀 뒤로 걸어주고는 엘리베이터에 태우고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며 문이 닫히는 찰나에도 꼼꼼히 살핀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했던가.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로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포기 없는 관심이 아이의 평온한 일상을 이룬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현아였다.
자주 바뀌지 않아 한 계절 내내 같았던 옷과 신발, 목덜미를 스치는 옷깃에 거뭇한 때가 묻어있던 경호가 다시 생각났던 것도 엄마가 된 뒤였다. 한 귀퉁이가 시커멓게 흙물이 들었지만 한 번도 빨아본 적 없던 것 같던 책가방, 필통 가득했던 부러진 연필들. 경호의 팔뚝에 때때로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던 멍자국들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요한 건, 새엄마였는지 아닌지였을지 모른다. 그저 그 아이의 곁에 있던 이가 사랑했느냐, 아꼈느냐, 목숨보다 소중히 매일 바라봐 주었느냐의 문제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고. 알 수 없었다고. 그리고 뒤늦게 알아버려 미안하다고, 전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현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