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어린것'
일곱번째 아이. 정민의 이야기.
멀리서부터 아빠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골목길 앞 전봇대에 기대 둔 빈병이 가득 담긴 포대자루를 걷어차는 소리부터, 이제 삭아내려 귀퉁이가 잘 맞지 않는 대문을 부서지듯 닫는 소리가 들리기까지의 그 시간이 얼마나 짧게 느껴지던지.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에 심장은 두근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펄떡였다. 주방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던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
"정민아, 얼른 다락으로 가!!"
"엄마, 엄마는...."
"정하랑 얼른!"
지난 월요일에 맞아서 터진 입가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여전히 퉁퉁 부어있어 물 한 모금을 마시는 데에도 아프다 했는데, 이렇게 상처도 진행중이거늘 아빠는 이미 잊은 걸까. 방에서 놀고 있던 정하의 손을 낚아채서 다락방으로 도망가는데 등 뒤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집구석은 가장이 오면 나와서 인사를 할 것이지!!"
".... 오셨어요."
"그게 인사야? 어디 갔어 이 새끼들은! 아빠가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아?!"
"... 애들한테 왜 그래요,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여편네가 미쳤나, 어디다 감히 소리를 질러!"
엄마가 무슨 말을 했어도 아빠의 손찌검이 시작될 것이었다. 한번 타인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공포를 본 사람은 그 우월감에 젖어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도 구분하지 않게 된다. 그 멈출 수 없는 굴레에 들어선 아빠는 우리의 매일을 살아 움직이는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제발 살려달라 애원하고 난 뒤, 자기 힘에 부쳐 주먹을 거둔 아빠가 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잠이 들면 그 후에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는 자괴감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멍자국과 달리 점점 더 진하게 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가장 경멸하는 이에게 가장 절실하게 매달리는 순간은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었지만, 그런 아빠를 떠나지도 못하며 맴돌고 있는 무력감은 주먹보다 더 아프게 나를 조각내고 있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울음을 꾸역꾸역 목 안으로 다시 집어넣다 보면, 그 억울함만으로도 배가 차는지 허기를 잊게 된다는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저녁때가 훨씬 지났지만 불안을 우겨넣은 속은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어린 정하를 끌어안고 두 손으로 서로의 귀를 막고,어깨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지났을까.
숨죽여 울던 정하가 지쳐 잠이 들고, 조용해진 바깥으로 나가봐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있어야 할지 몰라 눈으로만 문고리를 수천번도 넘게 돌렸다 놨다 반복하는데 거짓말처럼 문고리가 돌아갔다.
끼익.
혹시 아빠인가 싶어 숨이 멎어오던 찰나, 열린 문틈으로 엄마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정민아, 괜찮아. 아빠 잠들었어."
속삭이며 이야기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배어 있었다.
"엄마, 엄마 괜찮아?"
"응. 엄마 괜찮아. 정하 잠들었네.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괜찮다는 엄마의 말이 더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가 막히게 아프게 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아빠였으니까. 간신히 아물어가던 입술은 다시 터져서 부풀어 올랐고, 실핏줄이 다 터져 빨갛게 된 눈, 이미 너절해진 옷, 지난달에 부러진 갈비뼈를 매만지는 엄마의 팔뚝은 얼룩 강아지처럼 얼룩덜룩했다. 몇 개의 멍이 또 더해졌을까. 기진맥진해서 잠든 정하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엄마의 눈에서는 괜찮다는 말과 달리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손가락 끝까지 빠짐없이 퉁퉁 부어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으로 연신 내 어깨를 토닥였다.
"엄마"
"응?"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 아닌 글씨로 먼지가 소복이 쌓인 다락방의 마룻바닥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
[도망가 엄마]
"너는, 너는 어쩌고."
[살아있자 엄마]
입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엄마가 정말 떠나버릴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쥐고 있다가는 엄마를 완전히 잃게 될수도 있다는 공포가 더 컸기에 용기를 내야 했다. 이미 수년을 눈물과 비명을 오간 우리 셋이었다. 그 지옥을 앞장서서 걷고 있던 엄마의 어깨에 매달려 하루를, 한 달을 버티며 지내는 일상은 익숙해질 줄 몰랐지만 그 와중에도 눈치 없이 삐죽 자라난 키는 어느새 내가 매달려있던 엄마의 어깨를 마주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만삭의 몸으로도 차에 치일뻔한 나를 구하고 대신 다쳤던 엄마였다. 하지만 어떤 누구보다 더 강인하게 나를 지키던 엄마의 어깨가 생각보다 작고, 언제나 괜찮다고 할 줄 알았던 엄마의 눈빛이 나날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엄마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러니 엄마가 엄마를 잃기 전에, 놓아줘야지.
우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 지옥을 벗어났을 엄마니까.
[엄마. 제발 도망가]
꾹꾹 눌러쓰는 손 끝에
눈물이 한 방울, 눈물이 두 방울 떨어진다.
엄마의 빨간 눈에도
붉은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오늘의 이야기는.
시의 구절에서도 영감을 받았지만, [금쪽 상담소]에 출연한 배우 김정민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써 본 글이었습니다.
아픈 시기를 지나,
엄마를 지키는 어른아이가 된 김정민 씨와,
아픔 속을 살아내신 어머님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https://youtu.be/8hC7a7p_Hag?si=QfOtTe03e2hke3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