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결국 제자리에.
겨울이 오면 눈밭을 누비는 것이 삶의 큰 낙이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옷을 겹겹이 입고, 어기적어기적 곰처럼 움직이며 헉헉대고, 무거운 부츠를 신고 걸어야 하는 순간에는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슬로프를 내려가며 헬멧 안에 가득 찬 내 숨소리와, 눈앞에 펼쳐지는 온통 흰 풍경에 저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 가끔 마주치는 아찔한 순간 이후에 ‘해냈다’는 환희가 겹겹이 쌓이는 그 시간들.
늘 설렁설렁 산책하듯 탄다는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들을 참 좋아했다.
관절이 아파 자주 하던 운동들을 모두 내려놓고 지내던 몇 개월이었음에도, 겨울이 성큼 들어선 11월의 진료실에서 내가 선생님을 보자마자 던진 첫 질문은
“스키는 타도 될까요?”였다.
온몸을 꽁꽁 감싸고, 눈 위를 슥슥 미끄러져 내려오는 운동이니 다른 운동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조심하면 괜찮다는, 그런 대답을 은근히 기다리면서.
하지만 검사 결과를 보던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말했다.
“스키… 안 됩니다.
졸업하세요.”
왜 안 되냐고, 조금만 타도 안 되냐고 묻는 나에게 선생님은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자외선은 한여름 못지않게 루푸스를 악화시킬 수 있고, 추위에 장시간 노출되는 것 자체가 컨디션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간 복용 중인 스테로이드로 인해 이미 뼈가 약해져 있어 작은 부상도 골절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것. 이성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설명들이었다.
그래도…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진료실을 나섰다.
새로 사서 옷장 속에 고이 넣어둔 스키 바지를 입고 눈밭을 누빌 날은 이제 없겠구나 싶어,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저녁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내 마음은 꽤 담담했다.
너무 큰 좌절도, 너무 큰 슬픔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억울함과 왠지 모를 화까지 크게 표현하는 남편과 달리, 내 마음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그 평온함이 낯설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감정은 뭘까.’
그러다 우연히, 내 마음을 설명해 주는 이름 하나를 만났다.
쾌락 적응 이론.
인간은 큰 행복이나 큰 불행을 겪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기만의 정서적 기준점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행복도, 어떤 불행도 끝없이 지속되지는 않으며, 우리는 결국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자리로 복귀한다는 것.
지난 거의 1년 동안 내 마음은 분명 롤러코스터를 탔다.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있었고, 병명을 알고 난 뒤에는 끝이 없는 병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했고, 좋아했지만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 꿈꿀 수 없게 된 미래들을 하나씩 써 내려가며 슬퍼했다. 대학병원 진료실 문을 나설 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고 싶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악몽이 하룻밤에도 여러 번 찾아오는 시기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심연을 지나와 있는 내가 있었다.
이 나쁜 병에는 끝이 없겠지만.
그 안을 오가는 내 마음에는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었다.
과연 다시 미래의 계획이라는 것을 적어 내려갈 수 있을까 싶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또 담담히 내일 할 일을 적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살게 돼.”
어른들이 하던 이 말은, 이런 마음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그래서 다가올 일들에 대해 너무 많은 걱정을 미리 꺼내놓지 않으려 한다. 어차피 오면 겪게 될 감정들. 힘들면 힘든 대로, 조금 나으면 나은 대로. 어제와 오늘은 또 다를 테니, 그 다름을 안고 다음 날로 건너가 보자는 마음으로.
스키를 못 타게 되더라도.
햇살 아래 아이와 마음껏 뛰놀 수 없어도.
그래도 오늘 하루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사실만으로,
괜찮은 날이었다고 말해주며.
그것으로 충분한 오늘이었다고.
휴재기간 동안,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먼저 전합니다. 길지 않은 글들인데도 새로 시작한 일을 병행하며 일주일에 2편을 발행하는 것은 꽤나 버거웠는지 12월 초에 또 잠시 고장이 났었거든요. 그래서, 12월은 내내 푹 쉬며 이렇게 나누는 글들에 대한 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또 고장이 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종종 쉬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날은 좀 가벼이, 어떤 날은 좀 무겁게.
할 수 있는 만큼 애써보며 또 이어나가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외롭다, 아프다 생각하며 일상을 이어나가는 누군가에게 가서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죠:)
부디. 제 글이 가서 닿는 분들 모두가 평온하시기를 바라며.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