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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Jan 02. 2022

포말

유원지 惟夗地

Song.  Wakare / 別れ (이별) - Quruli



“야, 김은 죽었다며?”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운전을 하던 강이 내뱉은 말이었고 조수석의 박도 함께 키득댔다. 나, 강, 박, 그리고 김과 세영을 포함 우리 다섯은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고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오늘은 세영의 결혼식 날이었다. 밖에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과 품위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이들이지만 오늘 이 차 안에서 만큼은 모두가 다시 중학생이었다. 서로 간의 선이라고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거친 장난과 농담들을 주고받는 중학생. 상처받는 이들도 없었다. 받았다 한들 받은 만큼 돌려주고 킥킥대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사람의,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마저 희화화할 정도로 고삐가 풀린 괴인들이라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 김은 죽은 사람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들에게 김은 그저 연락이 아주 오래 안 되어 소식을 알 수 없는 친구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최세영은 용 됐다.” 키득대던 박이 빠르게 대화를 전환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는 부자랑 결혼해서 주부로 살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그걸 진짜로 이룰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세영은 실제로 그랬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로 들어가 모두들 슬슬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볼 무렵 누군가 세영에게 미래 계획을 물어보면 그는 “난 할 줄 아는 거 아무것도 없어.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반반한 얼굴로 여자 꼬시는 것 정도지. 그냥 재밌게 놀고먹다가 서른쯤 돼서 돈 잘 버는 여자한테 장가나 드는 게 꿈이다.”라고 했다.


친구들의 꿈 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뭐라고 얘기했었더라. 운전을 하는 강, 조수석에 앉은 박, 나, 그리고 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우리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꿈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게으르거나, 놀고먹는 걸 지나치게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다들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말투에선 부러움들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모두는 학생을 벗어난 이 나이에도 여전히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창 시절 성적을 떠올려보면 풍족하지 못한 어른이 된 것이 그다지 놀랄만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의외의 인물은 김이었다. 나는 늘 김만은 성공한 어른이 될 것이라  생각해왔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가 그랬고 틈만 나면 김에게 직접 말해주기도 했다. “너 나중에 부자 되면 우리 잊지 마라.” 콩주머니 안의 콩들처럼 붙어 다녔던 우리지만 김만은 특별한 인생을 살 것이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구나 김이 똑똑하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하지 못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토론 수업이었는데 어느 주제가 나오든 아이들은 그와 같은 편을 하고 싶어 했다. 토론을 할 때 그는 감정이 격해지는 법이 없었다. 항상 게임을 하듯 논쟁을 즐겼고 그가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미리 파놓은 함정을 상대에게 숨기기 위함이거나 그 논쟁의 승리를 결정할 선생님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전략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자신의 신념과 생각이 확고했고 부조리 함에 투쟁적인 모습까지 보이던 그는 어찌 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듯도 했다. 그에겐 아무것도 몰입할 것이 없는 시대였으니까.


그는 무엇을 배워도 곧잘 해냈다.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가 공부에 흥미는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성적은 늘 반에서 10등 중반에 머물렀다. 그리 대단한 성적은 아니었으나 그는 늘 시험 전날에서야 책을 펴 봤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놀라운 성적이었다.


그런 감은 성품마저도 훌륭했다. 남다른 예민함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심기를 잘 읽었고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지만 본인의 까다로움이나 예민함을 남에게 드러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물건을 고르거나 반찬을 가리는 것에서 그 성격을 유추했을 뿐. 그래서인지 선생님, 모범생, 불량아, 학교에서 겉도는 아이들까지 모두가 김을 사랑했다.


김의 아버지는 어느 중견 건설회사의 회계부장이었는데, 회삿돈을 주기적으로 빼돌렸다. 물론 회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김의 아버지는 회사의 비밀스러운 돈의 흐름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함부로 자를 수 없었고, 그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힌다 한들 생선 앞의 고양이만 바뀌는 꼴이라는 것 역시 회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저 어느 날 회장이 밥이나 먹자며 데려가서 한참을 딴청 피우며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너무 탈 나지 않게 드시게” 하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몇 년 뒤 김의 아버지는 퇴사를 했고 조명가게를 열었다. 건설사의 인맥을 잔뜩 가지고 있던 그는 조명가게를 차려 대형 건물에 들어가는 조명들을 잔뜩 납품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모든 준비를 신속하게 마쳤다. 드디어 자신만의 사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조명가게의 이름은 김의 이름을 썼다. 언젠가 김이 술에 잔뜩 취한 밤에 본인의 이름이 아버지의 조명가게 이름을 대신했던 것에 대해 ‘자식에게 신경이라고는 통 쓰는 법이 없는 부모가 어떻게든 죄책감을 덜으려 하는 행동’이라고 표현했었다.

김의 아버지는 지인들을 모아 고사를 지내고 점등식을 계획했다. 축하한다며 하하호호 웃는 소리에 맞춰 전기를 연결하자 ‘쩡’하며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조명들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사람들은 감탄을 했고 어쩌면 그 순간 김의 아버지는 눈물을 조금 흘렸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뉴스에선 IMF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후 김의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그에겐 알코올 의존증과 극심한 우울증 외에도 습관적 음주운전이라는 합병증이 있었다. 어느 비 오던 밤. 술에 잔뜩 취해 김의 어머니와 말싸움을 하던 밤. 김의 아버지는 평소보다 조금 더 흥분했고 김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에 쥔 포크로 딸기가 담겨있던 하얀 도기 그릇을 땅 땅 때리며 역설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거실의 온갖 살림을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


김이 나이를 먹고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그날의 모습은 거실의 온갖 물건들과 벽이 쏟아져 내려 거실 한가운데로 모인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김의 아버지는 분을 삭이지 못했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그 밤, 비 오고 축축하고 무겁던 그 밤에 운전을 하던 김의 아버지는 가드레일을 뚫고 도로 밖 낭떠러지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대체 누가 결혼식을 강원도 바닷가에서 하느라 사람들을 고생시키냐고. 적당히 어디 서울 근교에서 하면 모두가 편할 것을.” 과자를 입안 잔뜩 우물거리던 박이 말했다.


“둘이 서핑을 하다 만났다던가” 차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가 웅얼거렸다.


내가 말을 시원스레 뱉지 않고 우물거리듯 말하자 박은 신경질적으로 “뭐라고?” 하며 되물어왔다. 그에 운전을 하던 강이 더 큰 소리를 내며 박의 입을 닫았다.


“둘이 서핑하다가 만났다고! 아니, 너는 면허도 없는 게 앉아서 과자만 먹으면 되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야? 정작 운전하느라 고생하는 건 난데!”


박은 머쓱했는지 “그냥 그렇다는 거지” 했고


“그런데 김은 대체 왜 연락이 안 되는 걸까, 친구 결혼식날까지 말이야.”하며 화제를 돌렸다.

강은 차선을 바꾸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연락이 안될 만도 하지. 오죽 힘들겠냐.” 했다.


김에 대한 이들의 마지막 기억,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다 같이 모였던 장소는 장례식장이었다. 김이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혼자 생계를 책임지던 김의 어머니는 묘한 지병을 얻었는데, 그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을 찾아 약을 받았고 이런저런 검사도 해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의사의 최종 진단은 “스트레스받지 말고 쉬세요”라는 말 뿐이었다고 했다.

김의 어머니는 그녀의 사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정이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매일을 통증에 무겁고 기분 나쁘게 젖어가면서 자신과 김을 먹여 살렸다. 그런 어머니를 둔 김에게 다른 선택지라고는 없었다. 해보고 싶은 공부도, 하고 싶은 일도. 김은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돈을 빨리, 많이 벌 수 있는 일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원인은 분명했다. 두통은 아니었다. 심장에 문제가 생겼고, 갑작스러웠고, 빨랐다. 모두의 죽음이 그러하듯 원인은 있었으나 이유는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바라본 김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고 피곤함만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날의 김은 장례식 상주라기보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야근을 하고 있는 직장인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진짜 멋있다, 김이 바다라면 환장하잖아, 같이 왔으면 진짜 좋아했겠다.”

도로 옆으로 바다가 나타났다. 우리가 목적지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바다는 그의 몸 위에 수많은 파도들로 삐뚤빼뚤한 흉터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도들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모두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지상으로, 지상으로.


나는 사실 장례식 이후로 김을 한번 더 만난 적 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어색한 인사와 포옹을 나눈 뒤로 일 년 넘게 연락이 안 되던 그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나는 별다른 질문 없이 “그래” 했다.


정식으로 집들이를 한다고 초대받은 것은 아니지만 선물을 사야 할 것 같았다. 나도 무덤덤하게 대답을 한 것 치고는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본다는 생각에 꽤나 신이 났던 것 같다. 출근을 해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무엇을 사야 하나’라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사고 싶었고, 평범한 것은 싫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고 내 선물로 인해 그의 삶과 기분이 마법처럼 좋아질 수 있기를 바랐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인터넷에서 바다 사진을 주문했다. 사진은 근사했다. 날카롭고 가파른 절벽 뒤로 길게 늘어선 모래사장과 콘크리트로 바다를 가둔 인공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 안에는 형형색색 이쁜 색감의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그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으리라. 수영장 밖의 바다는 매서운 파도를 일으켜 콘크리트 벽에 희고 부글거리는 포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결코 수영장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한다.

 김은 '언젠가는 꼭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었다. 그가 이 선물을 보고 활짝 웃는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김에게 주소를 받아 간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짜리 빌라였다. 더군다나 계단 한 칸 한 칸이 높고 좁아 오르기가 좀 고된 것이 아니었다.


‘운동 좀 해야지’


늘 생각에서 멈추는 문장을 떠올리며 3층에 올라섰을 때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귀 옆에서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잠시 서서 내가 올라온 계단들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301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바라본 김의 집, 301호의 문에는 크기가 내 몸통만 한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 종이에 쓰여있던 검고 굵은 글자들이 눈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열쇠 스티커 한 번만 더 붙이면 죽여버립니다’





[포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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