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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Jul 23. 2021

트라제 XG

유원지 惟夗誌


Song. Theme (From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Score) - Jon Brion







 가난이 문득 실감 나게 되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 두 번째는 천천히 스며들다 어느 날 문득 정신 차려보니 온몸이 흠뻑 빠져있게 된 경우. 나의 경우는 후자다


 어렸을 때엔 꽤나 여유 있는 삶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시절에도 엄마와 아빠는 내게 '집에 빚이 얼만데 방 불 좀 끄고 다녀라', '집에 빚이 얼만데 장난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며 그들의 빚을 나의 교육에 오용, 남용하긴 했음에도 그때의 우리에겐 분명 여유가 있었다.


 아빠, 그러니까 만석 씨의 차는 그 당시 트라제 XG라는 H사의 미니밴이었다. 색깔은 파랑. 외관적으로 멋진 차는 아니었으나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만화영화 '라이온 킹'의 품바를 닮았었다.


 트라제는 프랑스어로 여행을 뜻한다고 했다. 실제로도 우리 가족은 트라제와 함께 많은 여행을 다녔는데, 그 여행들 속 내가 제일 좋아했던 부분은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도,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도 아닌 차 속의 시트 침대였다.

 

 조금 멀리로 여행을 갈 때면 뒷좌석에는 시트 침대를 깔았다. 요즘엔 에어도 들어가고 푹신푹신한 잘 나오는 것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그 당시 우리 것은 얇고 거슬거슬한 데다가 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다리를 뻗고 눕기 충분한 공간과 살짝 열린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맑은 하늘, 라디오 소리, 그리고 가족 모두가 시끌시끌한 소리를 내며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너무 행복했다. 행복이란 감정이 너무나 귀해진 요즘, 내가 가장 그리운 때는 그때인 것 같다.


 나는 워낙 어릴 때라 어른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능력은 없었지만 한동안 집의 경제력은 점차 상승했던 것 같다. 우리의, 나의 시트 침대가 너무 늘어나고 닳아 그것을 버리게 되었을 때쯤 만석 씨는 차를 바꿨기 때문이다. 그랜저 XG. 역시 H사의 것이었다.


 그랜저의 뜻은 영어로 웅장, 장엄, 위대함을 뜻하며 H사에서 그 납작하고 재미없고 지루해 보이는 자동차에게 달아준 의미는 '첨단 메커니즘에 정통 세단의 품위가 조화를 이룬 고급차라는 자부심과 긍지'라고 했다. 아무리 무생물이라지만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차가 스스로 멈춰 서서 더 이상 달리기를 거부해도 이해를 해줘야 할 것 같다. 나였어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 나의 이름 뜻이 ‘첨단 메커니즘에 정통 양반의 품위가 조화를 이룬 고급 인간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라고 했다면 너무 놀라 펄쩍 뛰어서 그대로 법원으로 착지해 개명 신청을 할 것이다. 왜인지 계속되는 XG에 그 뜻이 무엇인지도 찾아봤다. 'eXtra Glory'로 '최고의 영광'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면 EG이어야지 왜 XG라고 했을까 잠시 의문스럽기도 했으나 이내 '그거야 X가 E보다 멋지니까'라는 2000년대 초반 특유의 세련미가 아니었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련미를 촌스러움이 살해한 다음 세련미의 가죽을 벗겨내 뒤집어쓴 모습의, 예술적이라고 우긴다면 억지로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괴상망측한 날 것의 반항미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납득했다.


 여행을 보내고 위대함을 손에 넣은, 트라제를 보내고 그랜저를 손에 넣은 그때의 만석 씨가 최고의 영광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을지 아니면 아직도 부족한 영광들에 목말라하며 더 큰 영광을 꿈꿨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석 씨가 XG를 좋아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하기야 '최고의 영광'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사실 만석 씨가 그랜저 XG를 제 값을 주고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이모부의 차였는데 만석 씨가 이모부에게 웃돈을 얹어주며 트라제와 교환 거래를 한 것이었다. 차를 바꾸던 날 이모부는 자신이 원래 큰 차를 갖고 싶었으며 나중에 태어날 아이들과 놀러 다니려면 큰 차가 필요했다고 얘기했다. 이모부는 모두가 들은 것이 분명한데도 계속해서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했다. 트라제를 사랑했기에 그 교환이 영 탐탁지 않았던 나로선 그 차와 여행을 떠날 미생이전의 사촌형제들이 부러웠고 이모부는 자랑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내가 더 이상 차 뒷자리에 다리를 펴고 누울 수 없을 만큼 컸을 때, 많은 것이 변했다. 그동안 만석 씨의 차는 '제네시스'로 또 한 번 바뀌어 있었다. 또 한 번의 발전이었고 역시나 H사의 것이었다. 이 정도면 H사는 만석 씨에게 상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제네시스는 H사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고급차종이었다. 이름 뒤에  XG는 없었지만 그 시절 그랜저보다도 더 고급차였다. 제네시스를 타던 만석 씨는 골프를 즐겼다. 가족들과의 여행을 즐기던 트라제의 만석 씨와는 다르게. 만석 씨의 일이 바빠졌고 그 일 때문에 손님들과의 만남이 잦아졌고 그 만남에서 비롯된 골프 약속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취미 활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게 부의 여유에서 나온 것들이 아니라 가진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발악과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회피에서 비롯된 방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제네시스와 혼자만의 여행을 떠돌던 만석 씨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나를 데리고 아침운동을 가기 시작했다. 헬스장이 문을 여는 새벽 6시부터. 나는 그게 늘 고역이었다. 매일 아침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던 게 먹히던 것도 하루 이틀. 만석 씨는 운동을 하면 나아진다며 나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헬스장에 데려갔다. 그는 어느 날 나에게 얘기했다. 지금은 매일 아침 억지로 운동을 가는 것이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 고마워할 거라고, 너에게 아침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싶은 거라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는 나에게 뭐라도 남겨주려고 했다. 그것을 가르침이라고 말하기엔 하찮기 그지없었지만 그가 절박하게 나에게 뭐라도 남겨주려 함의 이유를, 그가 대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를 몇 주간의 아침 운동 끝에서야 알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 운동을 마치고 헬스장 건물에 있던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운동을 했고 밥도 먹었다. 만석 씨는 이제 다시 제네시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날 내려줄 테고 내 뒷모습을 차 안에서 잠시 바라보다 그대로 출근을 할 것이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집으로 돌아와 그가 차를 세우더니 내리려던 나를 말리며 잠시 얘기할 것이 있다고 했다.


"아빠 스마트폰 샀어"


하며 그는 애플도 삼성도 아닌 스마트폰 구매 순위의 3등이나 4등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값싸지만 몇 달 안가 느려지거나 고장 나는 기능으로 악명이 높았던 회사의 스마트폰을 꺼내보였다. 나는 거기에 조금 답답했고 안타까워


"스마트폰 살 거면 저한테 물어보시지, 그런 거 사면 안 좋아서 얼마 못써요 아이폰이 괜찮은데… 또 조금만 기다리면 신형 나올 거고…" 했다.


그는 "아니 그…" 하며 잠시 머뭇거렸고 이내


"스마트폰을 사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아빠 대리 운전하려고, 그거 하려면 스마트폰이 필요하거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이는데 시간을 꽤나 들였던 것 같다. 그 후 흐릿한 대화들을 나눈 뒤 나는 집으로 만석 씨는 회사로 갔다. 그날부터 만석 씨는 아침에는 본인의 원래 일을 나갔고, 퇴근해서는 저녁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대리운전을 나갔다.


 나에게 제대로 얘기해주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후배가 운영하는 대리운전 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모양인 것 같았다. 늘 그랬다. 나에게 뭔가 속시원히 제대로 얘기를 해주는 법이 없었다. 우리의 상황은 언제 이렇게 까지 곪아있던 걸까.


 어느 일요일 그가 낮 일도, 밤 일도 하지 않는 날에 일찍부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곤 어디 가시느냐, 밥은 드시고 오시느냐 묻는 나에게


"차를 팔았거든 그거 처리하고 올 거야" 했다.


 아침 9시에 나간 그는 얼큰하게 취해 밤 11시나 되어 돌아왔다. 과음을 했는지 씻지도 않고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지만 다음날 아침 역시 그는 운동에 가자며 나를 깨웠다. 우리는 가볍게 채비를 하고 나갔고 만석 씨는


"이 차 기억나지?"


하며 차키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전파를 쫓아 눈을 이리저리 돌렸고 곧 문이 열렸다는 걸 알리는 뿅뿅 소리와 함께 파란색 트라제가 나타났다.


 파란색 트라제 XG. 여행. 최고의 영광.


 트라제는 그대로였다. 다만 내가 너무 변한 뒤였다. 뒷자리는 그때만큼 넓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 운전을 할 때 뒷자리에 벌렁 드러누울 나이가 아닌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멜 나이가 되어 버렸다. 트라제는 더 이상 여행을 의미하지 않았다. 차 뒤에 붙어 은색으로 빛나던 X가 떨어져 나가 그 자리는 스티커 똥 자국만 남은, 회색의, 눈으로만 봐도 끈적거리는 X와 빛바랜 은색의 G도 더 이상 최고의 영광을 뜻하지 않았다.


 나는 이 차를 어디서 다시 찾아왔냐느니 이모부가 아직도 이 차를 갖고 있었냐느니 따위의 질문들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그뿐이었다.


 무엇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 늘 그래 왔다는 듯. 그렇게 잔뜩 웅크려 숨만 겨우 헥헥거렸다.


 같은 날들이 반복된다. 우리는 운동을 간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변명을 시도하고, 그게 실패하고, 옷을 대충 집히는 대로 입고, 아직 건조해서 뜨기 힘든 눈을 끔뻑거리고 미간을 잔뜩 구겨가며 나가 차를 타고 안전벨트를 맨다.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다시 나와 차를, 트라제 XG를 탄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거리의 모습을 보며 집으로 향한다. 새벽의 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조용히 움트는 촉촉하고 신선한 냄새가 난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차가 달리며 내는 바람이 차갑지만 싫지 않다. 아침의 맑고 옅은 햇빛에 눈이 부셔 눈물이 찔끔 났으나 닦으면 그만이다.




[트라제 XG]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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