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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Aug 10. 2021

여우와 포도

유원지 惟夗地

Song. Staring - Muted




 몹시 배고픈 여우가 덩굴에 매달려있는 검게 잘 익은 포도를 보았다. 여우는 본인이 가진 모든 능력을 사용했으나 이는 헛수고였을 뿐, 여우의 키로는 덩굴에 닿을 수 조차 없었다. 결국 포기한 여우는 실망감을 감추며 말한다 "저 포도는 너무 신 데다가 채 익지도 않았을 거야"




 여우 마을에서는 최근 포도라는 과일이 화제다.


 원래 북부에서 살던 여우들은 그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그에 맞춰 젊은 여우들이 주축이 되어 지루했던 산속의 삶을 버리고 평원이 펼쳐져있는, 다른 동물들과 인간들의 마을도 구경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남부의 땅으로 이사를 가자는 의견이 주를 이뤄 그들은 남부의 땅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엔 커다란 포도농장이 있었다.


 여우들은 포도를 처음 봤다. 북부에서 살던 시절의 여우들에게 자극적이고 맛있는, 그러나 여기저기 열려있지는 않아 가끔씩 맛볼 수 있었던 귀한 과일은 산딸기였다. 하지만 북부에 사는 여우라면 모두가 산딸기를 맛 보았다. 그것들이 열리는 높이는 여우들의 주둥이 높이와 딱 맞았고 조금만 부지런한 여우라면 결국은 그 산딸기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포도는 어떠한가. 1차적으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로 보호되고 있다. 물론 여우들에게 울타리를 넘는 것이야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포도가 열려 있는 나무의 높이였다. 여우들이 앞발을 들고 잔뜩 몸을 늘려도, 잔뜩 웅크렸다가 폴짝 뛰어도 도무지 그 포도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여우들은 주변에서 듣는 것으로 추측하는 것 밖에 그 맛을 느낄 방법이 없었다. 그 이야기는 주로 새들에게 듣곤 했다. 보통의 여우들은 새들과의 대화에서도 포도의 맛을 묻지 않았다. 이유는 자격지심이었으리라. '이 놈 봐라, 나보다 덩치도 작고 머리도 안 좋고, 할 줄 아는 것이야 나는 것 밖에 없는 놈,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한 입에 삼켜버릴 수 있는 놈이 포도 맛 하나 안다고 으스대는 꼴을 볼 수야 없지' 하고, 그러나 좀 더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여우들은 새들을 만나면 포도의 맛에 대해 묻고는 했다. 그러면 새들은 "아 그럼 먹어봤지", 하고 "그 맛이 맛있기야 하지만 뭐 대단한 천상의 음식은 아냐, 무슨 맛이냐고? 포도 맛이 포도 맛이지 뭐야" 하며 낄낄댔다.


 시간이 지나 그 포도농장의 포도가 시들고 다시 열리기를 반복한 게 열 번이 넘었을 무렵, 여우 마을은 그 크기가 몰라보게 커져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땅굴에 사는 누가 땅에 떨어진 포도를 먹어봤다느니, 어느 죽은 나무 속에 사는 누구는 어릴 적부터 도약질을 쉬지 않고 연습하더니 4살이 되던 어느 날 포도나무 밑에서 폴짝 뛰어 한입에 포도를 먹었다느니 한 소문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전달되었다.


 짧은 귀 여우는 어릴 적부터 친구 여우와 포도나무 울타리 앞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의 일과는 항상 같았다. 포도농장까지 누가 더 빨리 도착하는지 달리기 시합을 하고 도착해서는 잠시간 포도를 바라본다. 이후 ‘포도를 먹어본 어느 여우가 말하길 그 맛은 천상의 맛이라더라’, ‘누구는 생각보다 별로라더라’, ‘내 생각에 포도는 어떤 맛일 것 같다’, 등의 소문과 추측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그 앞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장난을 치다 배가 고파지면  쥐, 벌레들로 배를 채우고 노을이 붉게 타오를 때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여우 가 말했다. "나는 나중에 꼭 저 포도를 먹고 말 거야"


 짧은 귀 여우는 친구 여우의 자신감과 포부가 불편했다. 그는 그런 여우들이 언제나 아니꼬웠다. 하루를 겨우 살아내기에도 바쁜 지금의 자신도 한때는 친구 여우와 같은 큰 꿈들을 품었었다는걸 떠올리는 것이 너무 괴롭기에 그의 마음이 멋대로 만들어낸 방어수단이리라. 그래서인지 그는 친구 여우에게  

"못 먹을걸? 너는 일반 여우들보다도 키도 작고 뛰는 높이도 낮잖아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세상엔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일들도 있는 거야" 했다.

그러자 친구 여우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린 아직 어리니까 키는 더 클 수도 있어, 점프는 밤낮없이 연습하면 더 높아질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했다.


 그날부터 친구 여우는 매일 아침 뜀뛰기 연습을 했다. 폴짝 쿵 폴짝 쿵 폴짝 쿵... 긴 꼬리 여우는 그 꼴 조차 보기가 싫어 함께하자는 친구 여우의 말을 들은채 만채 하며 집에서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창가에 서서 창문 밖으로 친구 여우를 바라봤다. 또 어느 날은 문 밖에 나가 앉아 바라봤다. 그러다 어느 날은 친구 여우 옆에 앉아 구경을 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 친구 여우는 '저번 주에는 이 나무의 세 번째 높이의 가지까지 뛰었는데 이번 주는 다섯 번째 높이의 가지까지 뛸 수 있게 되었다'느니 '키 크는 것을 위해 요즘은 단백질을 열심히 섭취하고 있다'느니 따위의 자랑인지 열정인지 알지 못할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짧은 귀 여우는 그의 열정이 불편했고 부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도무지 저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저런 노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저런 노력이 소용없게 되는 순간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의 노력이 안좋은 결과를 맞닥뜨리고, 그 결과가 그의 모든 노력을 부정하고,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리고 어느 날 짧은 귀 여우는 그런 생각들을 친구 여우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 여우는 "어리석고 쓸모없는 건 노력이 아니라 지금 그 생각이야, 왜 인간들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인간들은 참 웃기지,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 끝없이 허덕이고 괴로워해 사실 그런 건 없는데, 그냥 태어난 거고 그냥 살아가는 거지 우리 여우들을 봐 눈앞에 놓인 삶들을 살아내는 것에 바쁘잖아 그냥 그뿐이야 쓸데없는 고민을 할 시간에 지금을 열심히 살아내는 게 가장 값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거라고, 그렇다는 건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느라 바쁜 인간과 코를 땅에 박고 킁킁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먹이를 찾아 나서는 여우, 누가 더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여?"


그날 짧은 귀 여우는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고 꿈을 꾸었다. 짧은 귀 여우는 친구 여우와 포도밭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내기 했다. 그들은 초원을 내달렸다. 시원한 바람과 발에 밟히는 풀들의 으깨지는 감촉과 몸에서 흩날리는 털들 푸른 하늘,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 꿈속에서 그들은 쉽게 높이까지 뛸 수 있었다. 원한다면 포도나무까지, 구름까지, 심지어 태양까지도. 그렇게 겅중겅중 뛰며 그들은 한참을 놀았다. 구름에 뒹굴고 태양에 몸을 녹이고 풀 밭을 힘껏 차내며.


 다음날 짧은 귀 여우는 친구 여우에게 포도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친구 여우는 놀란 얼굴로

"너는 관심이 없었잖아? 갑자기 왜?" 했다.

"내 눈으로 보고 싶어, 네가 포도를 먹는 데에 성공하는 것을. 너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네가 포도를 먹는 데에 성공한다면 나도 오늘부터 포도나무까지 뛸 수 있게 연습하려고."

친구 여우는 피식 웃으며

"그래, 혹시나 실패하더라도 같이 연습하자 이번이 끝이 아니니까" 했다.


 둘은 포도밭까지 내달렸다. 꿈속과 똑같았다. 짓이겨진 비릿하고 시원한 풀내음을 맡으며 얼마나 달렸을까 곧 달큼한 냄새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포도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친구 여우가 장난스레 말했다. 손님이라도 초대한 듯 짐짓 뻗대는 표정을 지어가며 말했다. 그것에 짧은 귀 여우는 알지 못할 편안함을 느끼며 킬킬댔다.


 친구 여우는 앞발과 주둥이를 바닥에 바짝 붙인 채 울타리 밑으로 밀어 넣었다. 뒷다리는 개구리 뒷다리 마냥 좌우로 한껏 펼친 뒤 꼬리를 좌우로 씰룩 쌜룩 대며 그 날렵한 몸을 포도밭 안쪽으로 통과시켰다.

"우리의 역사적인 첫 번째 시도다." 친구 여우는 씩 웃으며 짧은 귀 여우를 봤다.

친구 여우의 말에서, 표정에서 짧은 귀 여우는 그들에게 남은 무수한 기회들을 엿보았다. 그들이 그만두지만 않으면 주어질 무수한 기회들을, 그 기회들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 그냥 할 수 있으니 하는 그들의 편안한 모습들을.


 친구 여우는 몸을 바짝 웅크렸다. 아까와는 달리 최대한 작고 둥글게, 공이 되기라도 하려는 듯. 그가 몸을 잔뜩 웅크리자 온몸의 털들이 삐쭉빼쭉 위로 솟아나기까지 했다. 뒤로 뻗친 꼬리가 파르르 떨리다가 헙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친구 여우가 펄쩍 뛰었다. 길게 늘어진 그의 몸이 그리는 포물선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찰나의 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동안 공중에서 그의 몸짓들이 하나하나 눈에 담겼다. 더 높이 가기 위해 허공을 밀어내는 다리들과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아 보이는 꼬리, 뛰어오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쓰느라 전혀 관리되고 있지 못한 멍청해 보이는 표정과 포도를 넣기 위해 한껏 벌어진 주둥이, 새하얗게 빛나는 이빨들 까지.


하늘을 폴짝 날아오른 친구 여우는 쿵 하고 땅으로 돌아왔다. 달큼한 향내를 풍기는 포도를 입에 가득 물고서. 우적우적 그 포도를 한참을 씹던 친구는 꿀꺽 삼키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짧은 귀 여우에게 소리쳤다.


"이야 이 맛이구나! 이 맛이었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네 것까지 따올게"

하며 한차례 더 친구 여우는 폴짝 뛰어올랐다.


그때,



굉음이 울렸다. 그 굉음은 친구 여우의 몸에 구멍을 냈다. 그 구멍으로 인해 하늘에 털과 피가 흩뿌려져 올랐다. 태양과 구름과 털과 피가 한데 섞인 하늘이 괴상했다. 짧은 귀 여우는 잠시 그것이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윽고 친구 여우가 다시 땅으로 내려왔으나 이전처럼 네발이 아닌 온몸으로 내려왔다. 떨어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한번 더 굉음이 울렸다. 그 굉음은 이번엔 짧은 귀 여우 옆의 땅을 파 해치며 처박혔다. 그제야 친구 여우가 포도를 따먹은 나무 뒤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짧은 귀 여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포도, 친구, 인간, 그 어떤 것의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혀가 입 밖으로 나와 파닥이고, 온몸 구석구석 털들이 빠져 바람에 날리고, 발바닥이 땅에 박힌 돌들에 까져 가며 정신없이 내달렸다.


 짧은 귀 여우는 몇 날 며칠을 잠에 들 수 없었다. 먹을 수 없었다. 둥그렇게 몸을 말아 누워 숨만 쉬어댔다. 포도나무 아래 떨어진 친구의 모습처럼 그렇게.


 이틀정도 지났을까 짧은 귀 여우는 잠에 들었고 꿈을 꾸었다. 그는 친구 여우와 함께였다. 그곳에서 둘은 포도를 먹은 기억도 총에 맞은 기억도 없다. 등이 문득 간지러워 돌아보니 날개가 달려있다.


 '아 참 맞다 날개가 있었지'


 둘은 끝이라곤 없는 초원을 내달린다. 서로 밀치고 깨물고 뒹굴며 한참을 달리다 날기 시작한다.


 '이런 기분이구나'


 하늘을 나는 것은 너무나 기분이 좋다. 몸에 힘듦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게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물속을 헤엄치는 느낌이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스쳐 지나간다. 구름을 뚫고 지나가면 차갑고 작은 물방울들이 얼굴에 닿는다. 상쾌하고 자유롭다. 친구 여우를 바라본다. 너무나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짧은 귀 여우의 마음도 안정된다. 그러다 문득 열기가 느껴진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 열기인가 제자리를 날며 좌우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며 살피는데 어느새 거대한 태양이 눈앞에 있다. '이제 반대편으로 가자 너무 뜨거워'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 여우는 태양 곁으로 계속해서 날아간다. '제발 그만 가' 외치지만 마음속 외침일 뿐 입 밖으로 터져나오질 않는다. 그 상태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 뼈가 부러져라 가슴을 쿵쿵 때려보지만 목소리는 나오질 않는다. 친구 여우는 바라볼 수 조차 없게 강렬한 태양빛 너머로 사라진다.


 짧은 귀 여우는 눈을 뜬다. 네 발바닥이 비 오는 날 외출이라도 한 것처럼 땀으로 축축하다. 그는 미동도 않고 한참을 눈만 껌뻑이며 눈앞 허공을 바라본다. 그는 확인을 해야 했다. 그것이 친구의 차가워지고 굳어버린 몸일지 포도의 맛일지 인간의 얼굴일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그냥 무엇인지 모를 그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아직 사방이 밝은 낮이었다. 여우는 차박차박 포도농장까지 걸어갔다. 그 걸음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발 한발 걸어갔다. 그렇게 포도 농장 앞 울타리까지 걸어간 여우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친구 여우가 하늘을 날던 그 자리, 나무, 그리고 그가 떨어져 내린 그 자리까지.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던 짧은 귀 여우는 풀을 밟는 무거운 소리에 퍼뜩 귀를 쫑긋이고 고개를 돌린다. 굉음을 내는 총을 든 인간이었다. 짧은 귀 여우의 온몸과 본능이 저릿하게 도망가라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인간의 얼굴을, 눈을 바라본다. 인간도 왜인지 그에게 굉음을 내지 않고 천천히 다가올 뿐이다. 그러다 멈춰 선 인간에게 그는 말한다.


"너는 내 친구를 죽였어"


인간은 순간 놀란 듯했지만 짐짓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양손으로 바짝 쥐고 있던 총을 한 손으로 옮겨 잡아 땅에 세운다.


"미안하게 됐다"


인간은 사과를 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여우가 묻는다.

"너의 눈이 멀쩡하다면 뒤를 좀 돌아봐, 너희들의 포도가 이 땅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걸 봐, 그 수를 헤아려 봐"

"내 친구는 너희들을 해치려던 게 아니야, 너희들이 가진 모든 포도를 뺏거나 없애려던 게 아니야, 그는 딱 한송이의 포도가 먹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도 넌 내 친구를 죽였지"

역설을 뱉는 짧은 귀 여우의 눈에는 이미 포도송이보다도 더 큰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우물쭈물하던 인간은 입을 뗀다.


"나도 나의 변명을 좀 하고 싶다. 어떤 말을 해도 내가 네 친구를 뺏어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이 많은 포도들은 다 나와 내 가족들이 먹을게 아니야, 팔아서 우리가 먹을 음식을 사고 집세를 낼 용도지, 너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이 땅도 내 것이 아니다. 이 땅에 포도를 기르는 대가로 땅의 주인에게 포도를 판 돈의 절반 가량을 넘겨 줘야만 해 너희 만큼 우리도 먹고사는 것이 치열하다고"

"또 포도밭에 건너오는 건 너희뿐만이 아니야, 너희는 포도 한 송이만을 먹고 싶었지만 그 포도 한 송이만 먹으러 오는 짐승들과 벌레들의 수가 수십수백이야"

"또 이 집엔 아이들이 있어, 너희들이 농장 안을 맘대로 활개 치고 다니다가 내 아이들을 해치기라도 하면? 그래서 그 아이들을 잃기라도 하면? 그 이후는 돌이킬 수가 없어 그러니 과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큰일이 나기 전에 미리 예방을 하는 게 맞아"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여우가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래 네가 죽인 내 친구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듯이 말이야."


인간은 머뭇거렸다.


"... 그 사실은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할 거야 이 울타리를 넘어오지 마 그게 너희들에게도, 내게도 좋은 일이야"


하고는 포도나무로 손을 뻗어 포도 한송이를 똑 땄다.


"먹어, 다음에도 포도가 먹고 싶다면 내가 있을 때 와서 달라고 해라 그러면 얼마든지 주마" 하며 여우에게 포도를 던져주었다.


 포도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여우의 앞에 떨어졌다. 송이에 약하게 붙어있던 알알이 떨어져 굴러가고 몇 개는 터져버려 그 과즙을 쏟아내 버리기도 했다.


 여우는 멀어져 가는 인간의 뒷모습과 포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노을이 진다. 포도농장 뒤로 태양이 그 힘을 잃고 사라져 간다. 샛노랗게 작열하던 태양이 검붉은 토사물로 하늘 곳곳에 있는 구름들을 물들인다.


 이 시간대에는 무엇도 구별하기가 힘들다. 저 멀리 동산 위의 네 다리를 곧게 땅에 디디고 선, 귀를 쫑긋 세운 생명이 개인지 여우인지 알 수가 없듯이.


 여우는 긴 주둥이를 뻗어 포도 한 알을 조심스레 물고 송이로부터 떼어낸다. 산속의 조난자가 굶고 헤매다 겨우 찾아낸 열매가 독일지 음식일지 알 수 없어하듯이 조심스레. 그는 포도를 혀로 적시고 이빨로 으깨고 씹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잘 익은 포도다. 달콤한 즙이 흘러나와 입안을 이리저리 적신다. 그 새콤달콤한 향내가 너무나도 진해 근처에 벌이라도 있었다면 필시 여우의 주둥이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한 알의 크기가 얼마나 된다고. 짧은 귀 여우는 그 작은 알을 계속해서 씹는다. 저 멀리 제 모습의 절반을 내밀고 있던 태양이 머리 끄트머리만을 남겨놓고 사라질 때까지 여우는 계속해서 씹었다. 이제는 입안에 남은 것도 없어 보이건만. 계속해서 우물우물. 얼마를 그렇게 씹었을까. 이제 씹을 거리라고는 입 안의 살 밖에는 남지 않은 여우가 꿀꺽, 입안의 모든 걸 삼킨다. 포도도, 가득한 침도, 슬픔도, 울분도, 친구도, 인간도, 모두를 삼켜버린다. 그리고는 "깽깽" 한다.


 "멍청하다, 정말로 멍청한 모두다. 이 시고, 떫고, 쓰고, 맛없는 포도라는 것 좀 보라지, 두 번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맛이다. 여우들이 대대로 먹지 않게 해야 할 맛이다. 멍청한 녀석, 이까짓 걸 먹겠다고 젊음과 목숨을 걸었으니 멍청하고 또 멍청하다! 멍청한 인간 이까짓 걸 기르겠다고 이 넓은 땅을 혼자 독차지하다니 멍청하고 또 멍청해!"


그리고는 한참을 "깽깽" 했다. 목이 마르고, 쉬고, 너무 소리를 질러 피가 섞여 나올 때까지 여우는 "깽깽"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간에는 무엇도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것이 개인지 여우인지, 조소인지 울음인지.







[여우와 포도] 끝

유원지 惟夗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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