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는 하루. 그게 뭐라고.

by 김태연


급격히 떨어진 기온에 추위를 대비하라는 안전문자를 받았는데도,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식빵 좀 사다 줘. 너 먹고 싶은 거 하나 사도 돼. 하면서 만 원짜리를 아이 가방안주머니에 손수 넣어주었다. 사실은..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 동안 멍 때리고 있느라 돈을 준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뭘 했더라. 바닐라 라떼 보틀을 참다 참다 배달로 시켰고, 그리고 멍 때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책도 뒤적거렸지만 눈에 밟히지 않아 금방 덮어버렸다. 옷만 벗어던져버렸다면 자유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누워있었다. 바다는 없었지만, 바다 앞에 누워있던 기분이랄까(그래도 절대 바다 모래 위에서 눕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상 속의 바다에서나마 누울 수 있다) 아,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무방비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사유했다. 계속 계속..

처음엔 아이의 영어공부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 몰라, 나도 못하는 영어 애한테 어떻게 마구잡이로 가라고 해. 평생 영어로 먹고살지 말지도 모르는데. 그러다가 아이의 수학공부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수학 못하면 어쩌지? 나닮아서 이과 쪽은 영 아닐지도 몰라. 으어어. 또 그러다가 4차 혁명 시대는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나는 이번생엔 글렀다 쳐도 내 애는 취직은 하겠지? 하는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진지하고, 꽤나 심도 있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마치 주사위처럼 던진 숫자마다 제목이 다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멍을 때리다가, 이제 책 좀 읽어볼까 하고 책을 펼치는데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두 손에는 오늘 방과 후 미술시간에 만든 작품과 잔뜩 장을 보고 온 20리터 쓰레기봉투가 보였다. 그 봉투 안에는 아이스크림 3개(본인 꺼는 2개, 동생꺼는 1개) 쿠크다스. 왠지 빵집에서 사 왔을 것 같은 두툼한 식빵이 들어있었다. 식빵의 유통기한과 개수까지 세고 나서 유통기한이 넉넉하고, 식빵의 개수도 넉넉한 제품을 사 왔다며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꼼꼼하게 장을 보고 왔는지 열심히 말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수증은 어딨느냐 물었다. 다른 건 다 있는데 식빵이 얼만지 영수증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두 번 결제를 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500원도 잔돈으로 깔끔하게 남겨왔고, 20리터 봉투까지 야무지게 사서 구매한 물건들까지 야무지게 넣고 온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래 영어 좀 못하면 어때 사람 구실 하고 살면 돼! 여태껏 걱정하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이유 없이 바보 같아졌다. 그깟 영어나 수학이 뭐라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부터 하고 있었던 걸까.

제일 중요한 게 따로 있었던 것이다.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 물건을 어디에 담아야 할지 생각하는 법. 거스름돈이 맞는지 확인하는 법. 인사를 하는 법. 본인이 먹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는 법. 등등..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이런 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지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게 아니잖아? 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영어 학원을 보내야 한다며 내게 말해주는 주변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잖아. 속으로 말하며 나는 문제집을 꺼내서 푸는 아이의 작은 등을 바라본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나는 얼마나 네가 대견한지 모르겠다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잘했네. 라며 그 모든 말을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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