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삐.

by 김태연



나는 지금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제는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오늘은 맥주다.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터라 술을 끊은 지 좀 됐는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나를 달래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끔 술은, 그런 용도로 쓰인다. 그렇게 허기지는 속을 달래주는 어설프지만 꽤 강력한 무기로 말이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내 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 둘을 키웠지만 뭔가 남은 게 없다는 허무함이 몰려왔다. 애들 크고 나면 뭘 해야 하지 나는 뭐 하나 내놓을만한 경력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넌지시 꺼낸 말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나왔는데, 남편이 웬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럼 자격증이라도 따. 사회에는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거야. 너는 준비도 안 하면서 뭐가 오길 바라니.


네? 뉘예? 너님이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부장님인 줄? 그것도 하필 명절 전날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뭔데?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진 나는 멍청하게도 펑펑 울었다.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애 낳고 살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우울증이 온 게 나 때문이라는 소리야? 지금 약 먹고 이렇게 버티는 것도 스스로 짜증나 죽겠는데 이 상황이 모두 내 탓이라고? 그리고 동시에 섭섭했다. 신입 사원일 때 애 낳아서 그렇게도 들어와 달라고 애원해도 못 오던 사람이었는데, 나도 처음 애 낳고 생전 살던 곳도 아닌 생판 모르는 곳에서 혼자 어르고 달래 가며 애 키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나보고 준비 운운하면서 기회가 와도 못 잡을 거라는 그 개떡 같은 말에도 상처받은 내가 싫었다.


다음날 명절이 돼서 그렇게 양가에 가기 싫었던 건, 신혼 이후로 오랜만에 드는 느낌이었던지라. 아침에 밍기적 거리다가 결국 어머님댁에도 다녀오고(어머님과 아버님은 따로 사셔서 양쪽 다 가야 한다) 늦은 시간이라 친정에도 미리 다녀왔는데, 그 기분이 아직까지 안 풀린 건지 아버님댁에 가자는 남편의 말에 오늘은 생전 안 했던 개떡 같은 며느리가 된 것이다. 아버님을 보면서 헤헤 웃기에는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잘난 아들이랑 가서 '저희 잘 살고 있어요'라는 원맨쇼를 하기에는 나는 너무 못되고 못난지라 안 간다고 말해버렸다.

애들 데리고 너 혼자 다녀오라고 애들 옷까지 손수 입혀주고 보냈다(아마도 그 부분에서 남편은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진작에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돌아온 애들한테 술냄새 풍기며 잘 다녀왔느냐는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아서 참고 참다가 애들이 잠들고 나서야 냉장고에 거의 반년이나 자리 잡고 있던 작은 맥주 한 캔을 땄다. 맥주의 알싸함과 청량함이 낯설지 않아서 한참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노트북을 켰다. 아 사람은, 어느 정도의 선이 적당한 걸까. 너 선 넘었어. 삐삐. 남편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그거 상처 좀 받았다고 펑펑 울어가지곤 바보같이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어쩌면, 남편이 나를 이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의 우울의 깊이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왜 약을 먹고 그렇게 누워야 잠이 오는지. 알아주겠지. 하는 건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을 뿐이었다. 다르니까 이끌렸겠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10년을 같이 살아온 남편이 생소하기도 하다. 다만, 내가 깨닫게 된 건 10년이든 20년이든 같이 한 이불 덮고 살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 정도?




그리고 나는 잠시 잊어놨던 술을 오랜만에 꺼냈다.

먹는 느낌도 안 나서 성질난다. 술이라는 게 취하는 맛으로 먹는 건데, 머리는 멀쩡해지고 남편은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삐. 선 넘은 당신 거기까지만 하시오.라고 머릿속으로 경계음을 내보내는 중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고. 스스로 위안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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