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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May 09. 2023

우리가 보낸 긴 밤들



정말 뜬금스러운 말이지만,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나오는 길에 집이 아닌 다른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무작정 예전에 갔던 한의원을 가서 인바디 검사를 하고 다이어트약을 결제했다. 여자의 평생의 숙제는 다이어트라고 누가 그랬는가? 정말 기가 막힌 말이다. 3년 전에 똑같은 한의원을 가서 인바디검사를 하고 그때도 다이어트약을 지어왔는데 얼마 못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똑같은 행동을 또 하고 있다. 


발전이라는 게 도무지 없는 나라는 사람은 예전에도 분명히 했던걸 이번엔 꼭 해내리라 하는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결심이 나오는 건지, 또 되풀이하며 결제하고 말았다. 더 놀라운 건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결제하고 오는 길이 왜 이렇게 홀가분하던지. 꼭 빼겠다는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뭔가를 했어야 했다. 그게 쇼핑이었든, 다이어트든 간에 아니면 차라리 먹었던지. 뭔가 하나는 했었어야 했다. 집 때문에 불안한 거라고 그게 어떤 형태로든 사람마다 다르게 나오겠지만 무기력과 동시에 나오는 불안감이 일상생활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불안할 때 먹는 약을 두 세배로 하루에 먹고 있었다. 의사는 나에게 그 어떤 형태로든 불안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초조하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머리는 맑았지만 정신은 무기력했다. 


어쨌든, 다이어트약을 지어오면서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던 건 안정감이었고 몸은.. 몸은 모르겠다. 이제 먹어봐야 알 것 같기도 하고. 왜 먹어도 사람은 계속 먹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메웠다.



초조하게 보내는 긴 밤들이 저절로 많아지면서 자다 깨는 경우는 일상다반사였다.

수면제를 먹으면 바로 잠이 들지만, 효과가 얼마 가질 못한다. 깨서 잠이 안 오는 날이 더 많았고 나는 그 새벽에 잠을 자기 위해 별 짓들을 다 하면서 잠을 청했다. 

새우처럼 누워보고 잠이 오는 음악을 듣고 쓸데없는 몽상을 지우려 노력했다. 

뭐 그것들이 꼭 다 물거품이었던 건 아니었다. 어떤 날은 효과가 있는 날도 있었다. 

다만 효과가 있었던 날보다 없었던 날이 더 문제였기 때문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버스를 타고 걷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의사를 찾아갔다. 

그건, 거의 생존의 문제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알싸한 맛에 먹던 맥주에 흥미를 잃었다. 술에 흥미를 잃다니, 이건 불안에 대한 엄청난 결과였다. 나는 술맛이 정말 제대로 떨어지고 나서야 이건 잘못됐다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정말로 번쩍 하고 말이다.




우리가, 아니 내가 보낸 그 긴 밤들의 연속은 결코 좋은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초조와 긴장감이 합쳐진 불안으로 똘똘 뭉친 그 밤들은 정말이지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잃게 만들었다.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씻는 것,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그건 결코 정상적인 리듬이 아니었다. 나는 평온하지 않았고, 안전하다 느끼지 않았으며 그 영향은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무관심이 어쩌면 정서적인 학대였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을 하니 나는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든 의사를 만났어야 했고, 약을 받아왔어야 했다. 안 잡히는 택시를 잡아보려고 애쓰다가 평소라면 결코 타지 않을 버스를 탔다. 그렇게 겨우 만난 의사 선생님은 꼭 구세주 같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게 제일 도움이 되는 사람은 바로 의사였다.


나는, 나의 처참함의 이유를 몰랐고 하나씩 의사 선생님과 퍼즐을 맞춰가듯 찾아내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고, 약을 가방에 넣고 돌아오는 길이 길게 느껴졌지만 다이어트 약을 한의원에 가서 지어올 정도로 정신을 되찾았고 결코 오늘의 움직임은 수고스럽지 않은 아주 기가 막힌 움직임의 결과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을 청할 것이다.

오늘은 남편이 회식을 하고 오는 날이라 늦게까지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릴 것이고,

그가 잠든 후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약을 먹고 잘 엄청나고도 대단한 계획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과연 다이어트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이어트 약을 먹으면 식욕이 정말로 억제되기는 하는가. 수많은 의문점을 던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본다.

그리고 한의사를 생각해 봤다.

음....

50프로의 실패확률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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