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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May 10. 2023

아이스커피

차가운 얼음이 들어간 달달한 커피를 먹고 나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수요일 오전, 어제 동생이 애 낳기 전에 친정집으로 온다 했었는데 동생은 잘 왔을까 생각하며 안부전화를 했다. 지금 만삭인 동생은 곧 아이를 낳는다. 내가 낳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심란해져서 먼저 호들갑을 떠는 건 나였다. 내 동생은 덤덤한 목소리로 떨린다고 답했다. 나는, 역시 또 그런 동생의 목소리에 심란해진다. 

아마도 낳는 날엔 안절부절 동생의 연락만 기다릴 테지. 우리 집으로 산후조리를 하러 오라고는 했는데 오려나.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동생이 만약 오게 된다면 어떤 반찬을 해줘야 할지 생각해 본다. 손도 느려터진 여자가 무슨 재주를 부리면서 초산모의 산후조리를 해주겠다는 건지 나 스스로도 의문스럽다. 

그런데도 해주고 싶은 건 욕심 같기도 하고, 내가 받지 못했던 돌봄을 내 동생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내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나 자신의 생각이 부담스럽다. 내가 누굴 돌볼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깜빡 잠이 든 탓에 유치원 차를 놓칠뻔했다. 아이는 얌전히 깨어있는데 내가 10분만 자야지 했던 생각이 20분을 훌쩍 넘긴 탓이었다. 새벽에 부족했던 잠을 갑자기 보충하느라 온 에너지를 쏟은 탓인지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차량 올시간이 다 되어있을 줄이야. 

부랴부랴 애한테 혼자 씻으라고 하고 나는 입고 있던 잠옷을 얼른 갈아입고 아이 옷을 꺼냈다. 얼른 씻고 나온 아이에게 기계처럼 옷을 척척척 입히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내 손이 그렇게 빠를 줄이야. 헐레벌떡 통학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면서 아이는 내게 자신이 유치원에 가면 다시 자라고 했다. 너 언제 이렇게 컸니.


엄마가 졸린 거 기가 막히게도 어떻게 안 거야? 눈치도 빠르지. 응 고마워 사랑해라고 답하는 나에게 자전거를 가져오라며 아이는 다시 대답했다. 나의 둘째 아이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부쩍 커버렸다. 이제는 조금씩 타인을 생각할 줄도 안다. 네가 어른인 나보다 훨씬 더 어른 같네.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커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의 아이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부쩍 컸다. 이제는 어엿한 여섯 살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사실이 좋기도 하면서 새삼스레 아쉽다. 천천히 커도 돼. 엄마는 급하지 않아.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아그작거리며 얼음을 씹는 소리에 잠이 깬다. 그 잠깐 잠든 그만큼의 잠이 생각보다 깊었는지도 모른다. 실은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들었던 터였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나오는 시리즈의 올드팝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노래가 기막히네,라고 마지막에 생각한 것도 같다. 따라 부르고 싶은데 자주 듣지는 않았었기에 음만 웅얼거릴 줄 알지 가사는 모른다. 안다고 해도 아마 유창하게 따라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언어의 장벽이 이렇게나 높았던가. 나는 어차피 영어를 잘 못하니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그런 내가 또 아들을 앉혀놓고 영어를 들려주고 읽어주고 해석을 해준다. 별 걸다 한다. 정말. 

아그작. 또 한 번 얼음을 씹으며 생각한다. 살다 보니 별일을 다하긴 하네.


살이 찌면서 제일 별로인 점은 내가 살이 쪘다는 사실보다 드러낼 수 있는 피부 부분을 가려움증으로 인해 생긴 상처 덕분에 가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곧 있으면 여름인데 반바지를 못 입을 정도로 다리가 엉망진창이다. 왜 이렇게 가렵담. 심지어 스테로이드성분인 약도 먹고 있는데도 소용이 없다. 가려움증은 어릴 때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오히려 성인이 돼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아토피를 가지고 태어난 나로서는 가려움증이 일상생활의 연장선상이라 그렇게 나 스스로가 심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요즘은 좀 심하다. 

바지를 입으면 살갗이 아플 정도이니 남편이 보는 나는 오죽할까 싶은 거였다. 스스로 돌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부정적인 환경에 나를 놓아둔다. 나는 나를 돌보지 않는 내가 안타깝다. 그럼에도 그 안타까움보다 더 큰 마음이 귀찮음이다. 귀찮다니. 세상에나 이렇게 사람이 답답하다. 

하여튼 자기만의 방에 갇힌 사람들은 제 스스로 나오려는 법이 없다. 나만해도 그렇다. 나의 방에서 나와서 나를 돌보고, 나를 가꿔야 하는데 방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나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돌봐야만 하는 나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걸 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누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평생을 타인을 이해한다는 게 뭔지 모르면서 나이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건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바닥을 보여가는 아이스커피의 끝이 보인다. 내심 아쉬우니 직접 리필해서 다시 부어 마셔야겠다. 그러고 보니 아직 뜯지도 못한 새로 사 온 여름옷의 색깔이 무엇이었나 골똘히 생각한다. 네이비색이었나. 요즘에는 검은색만 그렇게 샀었는데 말이다. 키링도 새로 사 왔다. 아마도 둘째 아이가 보면 귀엽다고 할 테지만 주지 않을 거다. 이건 엄마 꺼야. 하면서 자랑해야지. 엄마 너무 귀엽다. 라며 말해줄지도 모른다. 

내 아이는 어쩜 그렇게도 말을 잘해주는지. 나보다 더 칭찬을 잘해준다. 나는 그런 아이가 너무너무 귀엽다. 나한테 귀엽다고 말해주는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끔은 나보다 아이가 날 더 사랑하는 게 느껴지는 날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울컥한다.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스며들게 되면 그렇게 몰아치듯이 폭풍처럼 날아올 때가 있다. 나는 그 감정이 생소하지만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사온 여름옷을 꺼내봐야지. 무슨색이었더라. 치마를 샀었나? 바지였던가? 그전에 사 온 점퍼는 너무 잘 입고 있다고 옷가게 사장한테 메신저로 보내줘야지. 음악은 뭘로 들을까. 늘 듣던 재즈가 좋겠지. 그냥 아무 가사도 없는 음악 말이야 그런 거. 눈에 보이는 살균 소독 티슈로 식탁도 한번 닦아줘야지. 어제 끓여놓은 보리차도 이젠 냉장고에 넣어놔야 해 쉴지도 몰라. 오늘은 더울려나. 설거지는 언제 한담. 남편이 오기 직전에 해야겠다. 오늘도 한번 나가볼까. 


그래. 이런 생각들이 막힘없이 이어지면서 무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나에게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냥 이런 거?라고 답할 것 같다. 그래. 그냥 이런 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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