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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May 15. 2023

어디에든, 어느 곳이든.



나는 울었다. 그것도 엉엉 울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초조함과 불안함에 약을 복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곧 슬픔으로 바뀌고 있었다. 약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제일 먼저 손이 떨려왔다. 나는 얼음을 가득 담은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유라도 알면 좋겠지만, 이유를 몰랐다. 아빠 나 너무 우울해. 우울해. 이 메시지를 읽고 단번에 전화를 걸어온 아빠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는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마나 슬펐을까. 나는 아빠에게 불효를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불효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에는 나의 슬픔은 너무나도 지나치게 컸다. 왜 우느냐고, 왜 울고 있냐고, 집에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며 내게 묻는 아빠의 목소리도 슬프게 느껴졌다. 세상 누구보다 날 가장 잘 이해해 줄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청소년기에 제일 증오했던 아빠였다. 나는 늘 엄마 편이었고, 엄마와 함께 있길 바랐지만 그 순간 바로 필요한 건 아빠였다. 아빠만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아빠만이 이런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울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아빠였을지도 모른다. 아빠 나도 모르겠어 근데 눈물이 자꾸 나. 나 너무 우울해. 이런 내가 너무 싫어. 도대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아빠는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아빠도 젊었을 때 우울증이 심했었어. 그땐 먹고사는 게 바빠서 어떻게 지나갔지만 아빠도 그랬어. 

지금 정신질환 약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인 나의 아빠는 나를 그렇게 위로한다. 아빠도 그랬었어.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청소년기에는 가정불화가 심했기 때문에 공황이 왔었다. 당시에는 공황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숨이 안 쉬어지고 머리가 깨질 듯이 매번 아픈 건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렸고, 몰랐다. 나의 부모도 어렸고, 몰랐다. 우리 모두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기를 겪었다. 우리는 서로가 가해자였고 피해자였다. 술과 폭력으로 삶을 물들인 아빠는 점점 이상해졌다. 정신병동에 세 번 정도 입원하고 나서야 아빠는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증오했고 회피했다. 맞서면 맞설수록 아빠의 미움을 받는 건 나였다. 그런 아빠를 나 역시 미워했다. 내가 아빠와 엄마를 증오한 만큼, 엄마와 아빠도 자식인 우리가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는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것. 가족이 서로를 증오한다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이었던가.




나는, 지난날을 부정한다. 그때는 그랬었노라고 마음으로 이해하면서도 부정한다. 나의 우울은 어디에서부터 온 걸까. 아빠의 말대로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이 더 깊어지게 내버려 둔 걸까. 아니면 살고 있던 지역을 떠나면서? 갑작스러운 임신에? 아니면 아빠의 폭력과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던 동안? 모르겠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서 자책하고 싶지 않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뿐이다. 현재의 내가. 지금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자괴감이 드는 내가 더 중요하다. 아빠는 환자였을 뿐이라고, 아무리 이해해도 이해되지 않았던 지난날들. 어째서 어른이 환자가 될 수 있어?라고 되물었던 어린 날들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아빠를 이해해야 하고, 환자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 모든 행동들을 이해하려면, 나는 인지해야 했다. 우리 아빠는 환자라는 것을.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어떠냐는 것이다.

나는 울고 있고, 손으로는 쉼 없이 쓰고 있다. 불안을 낮춰주는 약을 세 번이나 복용했다. 아빠와 전화를 끊고 즉시 의사에게 달려갔다. 의사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남편에 대한 건강 염려증이 지나치다는 것. 최근에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주의라고 나왔다. 내가 그것을 너무 확대 해석해서 남편이 어떻게 될까 봐 불안하다는 것. 지금 주요 핵심은 그 이유가 명확한 결론이었다. 약을 새로 지어줬음에도 잠을 깊게 자지 못하는 것.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의 안위를 확인하고 끊임없이 연락하려 한다는 것. 이사에 대한 스트레스와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가 이렇게 불안으로 작용해서 왔다는 것. 나는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현재의 나는 그런 이유들로 생각보다 깊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숨겨져 있던 우울증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자꾸만 눈물이 나요. 남편이 걱정돼요.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 돼요. 우는 상황보다 지금 이러고 있는 상황의 이해를 의사에게 듣고 나서야 알았다. 지나친 걱정이 불안으로도 올 수 있다는 것. 그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약을 먹으며 오늘은 둘째 아이가 오면 집으로 데리고 와야지.라고 생각했다. 불안에 지쳐갈수록 에너지가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불안한 상태인만큼 밖에 더 있을 수는 없었다. 아빠가 생각나고, 또 생각났다. 엄마가 전화를 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아빠한테 들었겠지. 티는 안내지만 내심 걱정되었을까. 생전 먼저 전화도 하지 않는 엄마가 전화를 먼저 했다. 대충 얼른 대답을 하고 끊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빠에겐 그렇게 보고 싶다고.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고 엉엉 울면서 말하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휴일에 놀러 오라는 엄마의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


지독한 우울감이 그림자처럼 붙어버렸다.



잘 있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야. 잘 있었어? 네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네가 날 찾아주지 않으니 내가 널 찾아왔지. 쯧. 자기혐오란 이렇게나 끈질기다. 내가 우울을 불러놓고 우울이 내게 붙은 것처럼 말하다니.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아이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다. 창문 밖을 보면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세상에나, 아이들을 두고 죽을 생각부터 하다니. 내 기필코 저층으로 이사가고야 말겠어.라고 다짐한다. 떨어져도 절대 죽지 않을 저층 말이야. 빌어먹을 우울증 조지고야 말겠어.라고 결심한다.



그리고 나는 운다.



마음을 확인하는 일은 어리석게도 눈물이란걸 깨달았을 때 이미 울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정말로 남편에 대한 걱정이었을까.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을까. 그 어떤 것으로도 이유는 불충분하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하지 않은 나는 엄마자격 박탈이다. 어리석은 인간.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 나는 그런단어들만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내가 불행하고, 불쌍하면서도 안타깝다. 이런 생각밖에 못 미치는 내가 한심하다. 자꾸만 자책감이 몰려온다. 빌어먹을 우울증. 진짜 조져버려야 돼.



아빠가 보고 싶다. 

아빠를 끌어안고 한없이 울고 싶다. 

나의 아빠가 불쌍하고, 그런 아빠를 끌어안으며 용서를 빌고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아빠만이 나를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나는 아이들에게 잠을 자라고 요청했다. 우는 모습은 진짜로 보여주기 싫어서. 제발 일찍 자달라고 부탁했다. 

아. 나는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망할 우울증. 망할 우울증. 이 말만 되새김하고 있는 내가 정말로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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