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by 김태연

날씨가 녹아내릴 것 같은 더위다. 아이들과 집 밖을 나섰다. 강아지와 한 바퀴 돌고 오니, 큰애는 잘 타지도 않던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자전거가 첫째 아이에 비해 너무 작아 보였다. 둘째 아이는 아빠가 밀어주는 그네에 까르르 웃고 있었다. 남편의 옷이 더위에 젖어있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나는 짜증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목소리로 말한다. 모두들 수긍했다. 왜냐하면 놀기에는 지나친 더위였기 때문에.



밍기적거리며 씻는 큰애에게 결국 화를 내고야 말았다. 더위에 약한 나의 고약한 성질이 결국 튀어나온 것이다. 빨리빨리 안 씻어? 제대로 안 씻을 거야? 엄마의 까랑한 목소리에 아이가 나와선 아빠품에서 울음을 터뜨린 건, 강아지를 씻기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가 미안해. 너무 더워서 엄마도 모르게 짜증이 났었나 봐. 미안해 정말(근데 정말로 너무 더워서 짜증이 솟구친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더울 수 있다니!) 큰애는 나의 미안함을 알았는지, 그새 울음을 그치고 훌쩍였다. 자전거를 타던 큰애도, 상처를 받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긴, 어른도 쉽게 상처받는데, 애들은 오죽할까 싶다.


지나치게 더운 여름에 집으로 피신 온 우리는 전부 씻고 에어컨 앞에 각자 제 방식대로 앉아 각자의 할 일을 한다. 나는 문득 씻고 나와 그런 생각이 든다. 사계절에 내내 읽힐 수 있는 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장 베스트 한 건 계절을 타지 않는 글이다. 머리를 말리며 생각한다. 그게 제일 베스트지. 사계절에 읽히는 글이라니! 계절을 타지 않다니! 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하면서 말이다.


봄에는 설레서 읽히고, 여름은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읽히고, 가을은 서늘하니 읽어보고, 겨울은 담요를 둘둘 말고 읽고. 얼마나 좋은 취미일까. 나는 마치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어떤 글을 찾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이 무더운 여름에 말이다. 날이 더우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아마도 정신도 흐물 해져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 나간 게 잘못이었나. 더위에 쥐약인 나를 스스로 내보내게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군. 마트로 피신했어야 했는데. 하며 대형마트 어플을 켜보니 대형마트도 쉬는 날이다. 음, 하는 수 없네.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생각해본다.


이 찌는듯한 더위에 바리바리 챙겨서 물놀이를 가는 부모들을 생각하면 정말 엄지 척. 하고 싶다. 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 더위에 약한 나는 심지어 물도 무서워해서 물놀이 가는 건 엄두도 안 난다. 그런 건 다 남편의 몫이다. 튜브를 챙기는 것도, 아이들의 수영복을 챙기는 것도. 심지어 가서 돌보는 것도 남편이 다한다. 나는 물이 무섭기 때문에, 물 근처엔 얼씬도 안 한다. 괜찮아 괜찮아하는 나도 제발 멀리 가지 마!!라고 소리치는 유일한 곳이 물이 있는 곳이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불안하기 때문에 절대 내 시야에서 멀리 가는 법이 없도록 한다. 물 앞에선, 나도 사람인지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닿지 않는 공포감이라 해도, 공포는 공포인 법이니. 무서움은, 소름 끼칠만큼 닿지 않는 선에서도 존재한다.


맑은 물을 보면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고, 깊은 물을 보면 안이 보이지 않아 무섭다. 얕은 물은 언제 바로 깊어질지 몰라서 무섭다. 이렇게나 다양한 이유로 무섭다니. 나는 그 모든 걸 통틀어서 말한다. 제발! 멀리 가지마!라고.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진지하게 말해줄 생각이다. 사실 나는 물을 엄청 무서워해.라고 말이다.


그런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큰아들이 7살이 됐던 해에 제일 많이 간 곳이 바다였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되었고(금전적인 부분도 컸다) 꼬박 2시간 거리를 달려서 대천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했다. 나는 수건을 깔고 앉아 머리에 혼자 우산을 쓴 채로 모래놀이를 하는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를 본다. 그때가, 나는 여름이 되면 늘 생각난다. 제일 많이 갔던 대천 앞바다에서 했던 아이들의 모래놀이가. 겁도 없이 남편이 회사 간 평일에 남편 없이 갔었던 평일의 바다는 한산했고, 뜨거웠다. 물을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여름 장면이 머릿속 카메라에 찍혀있는 듯 생생하다.


그 여름을 표현하라고 하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여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큰 아이가 커갈수록 여름이 돌아오면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그려진다. 나는 올해에도, 과연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커피를 마신다. 더 이상 따라가지 않겠다고, 모래놀이하지 않는다고 할 때까지는 가고 싶은데. 모래놀이 안 한다고 하면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묘하게 해방됐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이중적인 마음이라니. 사람이 참 간사하단 말이다. 나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갓 내린 커피를 얼음과 함께 먹는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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