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더웠냐는 듯이 서늘한 비가 내린다. 이제 곧 비가 그치면 엄청난 더위가 시작이겠지. 이제 곧 한창 성수기일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나는 준비하고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오늘은 대체적으로 기운이 없는 편이다. 알레르기가 도통 낫질 않는다. 약을 먹어도 그때뿐 다시 약발이 떨어지면 돋아난다. 덕분에 흐물흐물 젖은 휴지처럼 지낸다. 기운이 나질 않는다. 뭘 해야 기운이 날까. 나는 생각해본다. 좋아하는 게 뭐가 있더라. 뭘 해야 하지. 초조함이 다급해진다. 마음만 초조할 뿐, 몸은 별로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중이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작은 옷가게의 사장님이었다. 나는 옷을 너무너무너무 좋아한다. 누군가를 입혀보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입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미니멀 라이프를 한다 했으니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미니멀하게 살기엔, 나는 옷이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막 내가 옷을 만들어 팔고 싶다! 까진 아니고, 그냥 누군가 만들어 놓은 옷을 보기 좋게 진열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옷을 코디해주고, 그런 삶을 가끔 꿈꾼다. 옷가게를 하고 있는 사장은 말도 못 하게 속도 많이 썩는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 자영업자를 꿈꾸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옷이 많아서 옷을 버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인가 두 번밖에 입지 않았던 옷들. 버리기 아까운 돈들. 나는 돈을 그렇게 버리는 느낌이었다. 다 입지도 못할 옷을 머리에 올리고 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옷이 많았다는 소리다. 버리는 건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냥 안 입는 걸 버리기만 하면 됐었다. 안 입는 게 많은 게 문제였던 거지, 버리는 행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애정을 가지고 산 옷이 대체 언제였더라. 책을 읽으면 설레는 감정이 들면 그 옷은 버리지 말라는데, 난 설레는 감정의 옷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입을 것 같은 건 가지고 있고, 안 입을 것 같은 건 버리자.라는 생각으로 정리한다. 물건에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마도 새 물건을 살 때의 설레임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뭐, 이건 각자의 생각이다.
다리에 흉터가 많으니 반바지는 못 입고, 긴치마만 입거나 긴 바지만 입어야 한다. 스몰은 이제 엄두도 안 난다. 아예 들어가지도 않을걸? 나는 살 빼는 것을 과감히 포기한 여자니까 스몰 같은 건 버린다. 너무 짧은 티셔츠도 버린다. 옷은 본래 편하기 위해 입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한결 버리는 행위가 수월해진다. 이렇게나 많은 옷들이 내 옷장에 있었다니. 대체 이걸 어떻게 넣은 거야?라는 반문이 들었다. 그만큼, 버려도 끝이 없었다.
작은 옷가게에 사장님이 되고 싶었던 내가 집에서 옷가게 차릴 판이네. 으하하. 나는 웃으며 기막힌 상황을 지켜본다. 이렇게나 많은 옷들이 나한테 있었다니. 나는 돈을 대체 어디에 쓴 건가? 다 여기에 몰빵 했나? 차라리 주식이 낫겠군. 나는 감정 없는 노동자가 된 기분으로 주위를 살펴본다. 옷이 돈으로 보이기도 하고, 먼지 구덩이로 보이기도 한다. 장바구니 안에 넣고 헌 옷 수거함에 가져갈 셈으로, 재빠르게 스캔한다. 남은 옷도, 아직은 많다. 헌 옷 수거함에 넣고 나서야 마음이 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이제 못 입는 내 옷들. 빠지지 않는 살들이니까 더 이상 입을 일이 없다. 더 이상 스몰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짧은 기장의 옷으로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를 가리려고 큰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나는 편함을 중시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조금씩 사라진다. 옷이 나를 얽매고 있다는 건, 내가 옷에 묶여있다는 뜻이니, 으.. 생각해보면 좀 무섭군. 이 집도 내 집이 아닌데, 대체 몇 평에 옷을 내어주고 있었던 건가. 그것도 다 돈인데! 집을 억 소리 나게 전세로 들어와선 그 억 소리 나는 돈 중에 옷으로 방을 내어주다니, 나는 잘 곳이 없어서 소파에서 자는데 말이다!(실은 둘째가 오줌을 두 번이나 침대에 싸는 바람에 그 침대는 왠지 찝찝하여 눕지 않는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신랑한테 말도 못 하고 야금야금 고양이처럼 정리하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원래 상황이라는 게 다 본인이 닥쳐봐야 깨닫는 법. 나는 옷가게 사장님은 절대 될 수 없겠구나, 쓴웃음을 짓는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판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행위인지 이미 중고거래를 통해 많이 겪어본 바. 나는 절대 친절하고 상냥한 사장님은 못될 것이고, 얼마 가지 않아 나의 옷가게는 망할지도 모른다. 젠장. 그렇게 생각하니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원래 사업 시작할 땐 난 잘될 거야 라는 마음으로 시작한다는데, 나는 망할 생각부터 한다니, 이미 마음부터가 틀려먹은셈이다.
한참을 시간 들여 정리한 옷장에는 옷들이 예전만큼 남아있지 않았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라고 생각한다. 입을 옷이 많지 않은 만큼 준비하고 나가는 시간이 확실히 많이 줄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예쁜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여전하고, 아쉬운 건 사실이다.
그래도 어떤 삶을 선택할래.라고 묻는다면 지금을 말할 것이다. 옷이 많지 않은 삶도, 나쁘진 않으니까.
아쉽다고, 내 발을 스스로 묶을 필요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