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스타, 김치.
리니아와 매일같이 만나 시간을 보내면서 여기 사람들의 생활하는 모습을 꽤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들을 가진 엄마로서의 삶 또한 같이 공유하면서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꽤 두터운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사실 나도 우리 가족 중에선 철부지가 없는 편인데 나보다 훨씬 왈가닥인 그녀의 모험성은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그녀의 경험담을 듣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머릿속엔 늘 아이디어가 꽉 차 있었고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졌다. 그녀가 쏟아내는 그 많은 이야기의 중심에 늘 일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어떻게 자연과 어우러 사느냐’였다. 학교도 아니고 환경운동가의 연설을 들으러 온 자리도 아닌데, 이런 얘기를 하는 그녀가 처음엔 왠지 낯설었다. 종교적인 이념 차이도 아닌데 왠지 난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를 평소에 어떤 누구와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디어를 통해, 아들을 키우며 교육을 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가끔 혼자서 심각해진 적이 있지만 누군가와 이를 가지고 토론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헌데, 사실 그녀뿐 아니라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환경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 진심인 걸 알게 되었고,그게 말뿐이 아니라 일상에서 정말로 그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인도로 공연을 갔던 마티가 일찍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어 내가 떠나기 전 며칠을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가 돌아온 다음 날 저녁, 마티는 자신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고 그 날 리니아와 함께 덴마크에 갔다가 저녁에서야 숙소에 돌아온 나도 아들을 재운 후, 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마티의 귀환 파티 겸 오늘은 아무래도 술을 마시며 흥이 돋을 거라 잔뜩 기대한 나는 빙 둘러앉은 그들 사이에서 혼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웬일! 친구들을 불러 놓고 그 늦은 시간에, 술 마시기 딱 좋은 그 타이밍에, 마티가 내온 건 술이 아니라 인도에서 공수해 온 ‘차’였다. 그는 인도에 있을 때 대접받았다던 방식으로 ‘차’를 맛나게도 탔다. 아, 처음에 차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려는 의도인가 보다 생각했다. 마티의 인도 여행 이야기, 자기소개, 근황들을 주고받았다. 한참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걸 보니 이 사람들, 파티 할 분위기는 아닌것 같았다. 차를 마시며 그래도 분위기가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꾸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불만을 내뱉고 사는지에 대한, 갑자기 쌩뚱맞은 진지한 이슈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키가 190센티미터는 될 것 같은 한 힙스터 오빠가 대꾸했다.
“맞아, 얼마 전 할아버지랑 이야기하는데,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우리네가 할아버지 세대보다 더 힘들다는 말을 했다니까. 그러다 보면 결국 선택을 못하게 될 때가 있거든.”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내가 결정 장애인 걸 난 항상 이 핑계를 사람들에게 어필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예전엔 뭐든지 부족했지만 요즘 세상엔 모든 게 넘쳐나니 너희들은 그 배고픔을 모를 것이라며 요즘 젊은 사람들을 비난했고 이에 그가 받아친 생각이 그렇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가 과잉 경제 시대에 살면서 섣불리 저지르는 잘못과 그 습관으로 인해 얼마나 환경을 파괴했는지에 대한 심각한 주제로 넘어갔다. 이 날 이들의 이 대화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먼저, 난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나는 정말 이들을 선진국에 사는 시민의식이 월등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살았던가? 왜 이 힙스터들은 술도 없는 이 자리에서, 외모와 어울리지도 않게 이런 주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는가? 여기서 아무말 안하는 나는 똥멍충이인가? 이 쎄한 기분은 부끄러움 때문인가? 죄책감인가, 아니면 환경 문제가 이미 실생활에 너무 가까이 근접한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처음 리니아와 이 주제로 얘기하던 날, 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괜히 찔리는 불편한 마음을 달래느라 애썼다. 너무도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마치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사는 사람처럼 느껴져 괜히 기분이 상했다. 아니, 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나도 머릿속에 다 인지하고 있던 것들이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들었던 익히 아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인데, 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알고는 있지만 일상에서 누구와 만나 굳이 대화로 이어나갈 만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이들은 이 주제를 평소에 너무 자주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자랑하듯이 서로 자기네들이 실천하고 있는 습관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의 못된 심보는 괜히 이를 아니꼽게 보고 한 날 리니아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너네, 채식주의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거,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자꾸 환경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그러는 거,,, 혹시 스웨덴에서 그런 게 요즘 유행인 거야? 그게 아니고선 너도 나도 다 그러고 있다는 게 솔직히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돼.”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네 말이 맞아. 사실 여기서도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거론된 지 꽤 되었지만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생활화가 된 건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굳히게 된 거야. 그리고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마치 유행처럼 번졌지.“
이 말은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고 나의 온 신경을 자극시켰다. 한 때 “유행”이라는 단어를 괜히 멀리하려 한 적이 있었다. 어릴 땐 뒤쳐지기 싫어 열심히 유행을 좇았고 조금 나이가 들어선 다 똑같이 보이는 게 멋이 없다고 생각해 남들 따라가기 보다는 개인의 취향을 돋보이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그 시절 유행은 ‘환경문제 인식하고 실천하기’였다. 젠장! 말만 들어도 멋있다. 누가 뭐래도 이게 유행인 나라는 멋진 거다.
그동안 이곳에서 만난 사람 중 열에 아홉이 채식주의자였다. 이 또한 환경문제를 인지하고 그 사회에서 빠르게 퍼져나가는 변화 중 하나였다. 그동안의 내 삶에 ‘체식주의자’는 그 의미를 정의하는 어떤 한 단어 이상으로 쓰인 적이 없었다. 내 주변에 채식주의자는 한 명도 없었고, 그 당시 한국은 그런 사람들을 좀 특이하게 보는 사회였다. 그런데 여긴 이상한 별나라인가? 나의 첫 스웨덴인 만남인 마티를 비롯해 그의 친구 티아. 그녀의 자식들, 칼의 누나, 리니아(그녀의 아들인 이반은 태어나서 4살이 될 때까지 고기를 입에 댄 적이 없다.). 그의 가족 , 또 다른 마티와 그의 모든 친구들, 그 아파트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이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개인적으로 고기를 좋아하지 않은 나인지라 그들의 식단이 오히려 내게 반갑기는 했다. 매번 고기를 골라내는 성가신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찡그리는 옆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마트에 가면 채식주의자를 위한 코너가 꽤 넓게 차지하고 있고 종류도 어마하게 다양했다. 내가 아는 고기 대체 식품이라곤 콩으로 만든 콩고기가 전부였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채식주의자로 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채식을 하면 선택의 폭이 채소로만 한정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요가 많다 보니 제품의 종류와 수가 많았다. 또 흥미로운 사실은, 나의 스웨덴 친구들은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돈을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의 방식을 택했고 그렇게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돈을 최대한 안 쓰려고 하는데 특이한 건, 막상 사야 할 물건이 있으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첫 호스트 마티는 유기농법으로 생산한 식품이 안전할 뿐만 아니라 환경을 덜 헤치는 농법이기에 환경을 생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게 사람이라 나도 점점 그들의 그런 습관들을 따라가게 되었고 삶의 방식도 변화했다.
어느 날, 시몬이 나와 김치를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 사람들이 채식을 하면서 건강해지는 걸 몸소 느끼면서 ‘건강한 식단’은 이들에게 중요 관심사였다. 이 중 반가운 소식은 ‘발효식품’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김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꽤 높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시몬에 말에 의하면 스웨덴에서 김치는 요새 떠오르는 스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집 근처에는 말뫼에서 유명한 김치 전문가도 있었다. 그 사람은 김치에 대해 공부하고 김치의 이점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김치를 담그는 일일 클래스도 운영 중이었다. 시몬은 그녀의 김치보다 오리지널 한국인의 리얼 김치를 맛보고 싶다고 큰 기대를 안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존심이 발동해서 그간 시댁에서 졸병으로 임했던 김장의 경험을 떠올리며 한국에서 김장 문화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김치를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부심에 대해 일장 늘어놓았다. 이에 시몬의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 올랐고 난 크게 마음먹고 해 보자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다음 이틀 동안 김치 만드는 법에 대해 엄청 찾아보았다. 그동안 나의 김장 경험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 만들어진 재료에 속만 넣었으니.... 그래서 레시피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과정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혼자 김장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이번 기회로 나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다. 시내에 아시안 마트 두 곳을 돌고 나니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모든 재료를 가지고 리니아의 집으로 내려갔다. 이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일층에 사는 이웃도 김치를 만들어 보고 싶다며 동참했다. 그날 우리는 배추를 절이는 시간까지 7시간 만에 김치를 완성하고 밤 10시, 녹초가 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 침대 밑에 비닐봉지로 잘 싸 둔 김치를 꺼내 우리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동안 김치를 못 먹어 안달이었던 아들을 위해 난 김치찌개를 만들어 내려갔고, 시몬은 고이 모셔둔 익은 김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뚜껑을 열자 퍼지는 김치 냄새에 아들과 난 고향의 냄새에 기쁨을 만끽했고, 시몬은 감동의 미소, 리니아는 코끝을 찌르는 강한 향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김치 맛을 보았고 어마 무시하게 매운 맛에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내게도 맵게 느껴질만큼 고춧가루가 상당히 매웠다. 하지만 워낙에 김치를 좋아하는 아들은 물로 혀를 달래 가며 계속해서 숟가락을 찌개에서 놓지 않고 흡입했다. 그 모습을 보며 리니아와 시몬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다. 김치를 만들었다는 소식에 이웃집 사람들이 맛을 보러 들렀고 그 바람에 김치는 이틀 만에 동이 났다.
어느새 스웨덴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그날 저녁 아들과 이반을 재우고, 시몬과 리니아, 마티와 나는 모두 리니아의 부엌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린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이게 꼭 마지막이 아닐 거 같다며 언제 다시 내가 올 건지 물었다.
“글쎄,,, 내가 돈을 모으게 되면 그때나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직장이 없으니 언제 그 돈을 모을수 있을지 나도 궁금해!”
이 말을 진지하게 들은 그들은 잠시 후 휴대폰을 꺼내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스웨덴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어!! 시베리아 열차를 타면 가능해!!! 네가 기차 안에서 7일을 자야 하지만 말이야.”
마티는 자기의 친형이 중앙아시아까지 기차로 여행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했다.
그 어떤 방법이 되었든 간에 그들의 그 마음 씀씀이가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내가 진심으로 왔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득, 한국에서 한 커뮤니티 세미나를 통해 만났던 분이 말씀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스웨덴 사람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처음에 친해지기 힘들 수 있지만, 한 번 친해지면 그들의 우정은 영원이에요.”
난 이곳에서 영원히 우정을 나눌 친구들을 만난 것일까? 여행을 떠나오기 전, 불과 3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세상엔 모험할 만 한 것들이 무한하고 그걸 찾으려고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다른 세상을 맛보았으니 다시 좁은 곳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졌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한 곳에 고이지 않고 계속해서 큰 물로 흐르는 것이 맞고 그간 만나게 될 것들에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은 내가 탐험하지 못한 곳들이 너무도 많고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나와 맞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을 찾았으니 이곳에서 살아야겠다는 꿈을 갖게되었다. 사실 이 생각은 진작부터 있던 거라 여행 내내 어떤 직업이면 스웨덴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자주 했다. 그리고 점점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외국인의 메리트를 가지고 빨리 자리를 구할 수 있는 직업, 바로 셰프가 아닐까.
한국으로 돌아오고 며칠 후, 첫 번째 호스트였던 마티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로 시작해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의 삶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다시 스웨덴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져, 그곳에서 살 궁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티는 얼마 전 한국에 관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내게 꼭 보기를 권하며 링크를 보냈다. 넷플릭스의 ‘셰프의 테이블“이라는. 시리즈에 한국 음식을 소개하는 에피소드였다. 어느 한 유명한 셰프일 거라 예상했지만 시골 적막한 사찰에 한 스님이 소개하는 한국의 사찰 음식에 관한 내용이었다. 영상을 보고 난 후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웨덴에는 채식주의자가 많으니 그들을 위한 셰프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난 종로에 있는 한국사찰음식 문화원을 찾아갔고, 이후 한 스님의 연구소에서 6개월 간 사찰음식을 배웠다. 오로지 스웨덴에 가서 살겠다는 마음 하나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다. 그 사이 리니아와는 계속해서 연락을주고 받았는데 언젠가 한국에 오고싶다던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이반을 출산하고 쓰지 않았던 출산 휴가를 이번 여행에 쓸 계획이었다. 게다가 유급으로 경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다. 리니아는 그렇게 자기 삶에 또 새로운 도전으로 경험을 만들고 있었다.
2018년 4월, 서울역에서 이반을 등에 업고 있는 리니아를 만났다. 마치 어제까지 만났던 것처럼 여전히 편하고 변한 것이 없었다.
며칠 후, 시몬까지 한국 땅을 밞았고, 그렇게 그들과 우리 가족의 한 달 동거살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