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사랑
“Have fun…”
남자 친구는 오늘도 그 여잘 만나러 나간다. 그에게 보내는 내 인사말, 해브펀…
어제 난 그에게 두 번째로 물었다. “그래, 너랑 그 여자 얘기 좀 해봐. 둘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뭘? 우린 그냥 친군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
“네게 친구의 정의란 뭐야? 친구끼리 키스, 딥키스도 하고 그래?”
“뭐? 아니!”
“미안한데, 우연히 나 그 여자와의 네 채팅을 봤어… 난 왜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
가만히 1분 정도 서 있다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조용히 주방으로 가더니 손톱을 깎다가 유튜브를 보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가 밖으로 나간 걸 알았다.
그 채팅을 정말 난 우연히 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그는 노트북을 티브이에 연결하고 한참 다른 걸 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노트북 선을 정리하려고 빼다가 커서가 그쪽에 닿아서 메시지 창이 떴다. 최근 대화 내용이 화면에 꽉 찼다. 독일어로 되어 있지만 온갖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그 창을 나는 곧장 닫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고 둘의 사이를 한 번 의심해서 물은 적이 있었지만 그 당시 그는 나를 마치 질투에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
“아 정말! 넌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나랑 밥시 사이를 의심해? 우린 그냥 친구고… 아 넌 이런 관계 이해 못 하지? 근데 정확히 말하지만 난 걔랑 친구고 다른 관계가 될 일 절대 없어!”
이 말에 난 내 행동을 자책했다. 전 여자 친구와 베프가 되고 내 앞에서 그 친구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그 상황을 이해 못 하는 나를 지적질한 적이 있었을 때도 난 나를 비난했다. 마음 좁고 쿨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채팅의 내용은 너무 적랄하게도 야하고 자유롭고 역겨웠다. 구글번역을 켜서 화면을 번역해서 읽어보았다.
“우테 다음에 이런 감정은 내 생에 정말 처음이야. 너와 키스한 이후로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 어떻게 너 없이 밤을 보내지?”
화면을 드래그해서 점점 위로 올라갔다. 중간에 내게 보냈던 사진들이 겹친다. 그리고 둘의 대화가 진해지기 시작한 날짜를 보았다. 정확히 내가 지지난달 인도로 요가수련을 하러 갔을 때였다. 그것도 내가 출발한 그 당일부터.
난 이 사람을 많이 사랑했다. 이 사람 때문에 과감히 오스트리아행을 택했고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힘들었다. 비자를 받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처음 1년짜리 비자를 받고 비엔나에서 적응해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말이 줄었고 자주 불만을 토했고 나를 무시했고 심지어는 관계를 끊냈다. 연인끼리 싸우는 건 당연사니 달라질 거라 믿었다. 나는 이 나라에 이 사람밖에 없다. 설마 본인 하나를 보고 온 내게 이런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라곤 당연히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맨스가 없어지면서 나는 매우 자존감이 낮아졌지만 현지에 적응해야 하는 또 다른 숙제 때문에 그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되지도 않는 독일어를 붙잡아 시험도 통과했고 매번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있어도 그의 외출에 동행에 언저리 어딘가에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의 주변인들은 이제 나를 그러려니 대하는 게 느껴졌다. 세, 네 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내게 말을 거는 시간은 10분 정도. 남자 친구는 혼자 떠드느라 바빴다. 그가 멀리 느껴지다가도 매번 나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되고, 이들과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고 계속 비벼대다 보면 나도 언젠가 이 안에 속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가만히 보면 그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날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항상 전여자 친구이며 베프인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았고 둘이 속삭이는 모습을 난 반대편에서 자주 지켜봤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수치심도 들었지만, 전 여자 친구를 질투하는 여자로 보이기 싫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관계를 2년 전에 일방적으로 끊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 한 이유는 끝까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이 자리에 존중받지 못했지만 계속 있었다.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커플팔찌가 그의 책상에 놓인 걸 봤을 때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지만 내걸 굳이 빼지는 않았다.
난 이 사람의 냄새가 정말 좋다. 이 사람의 못난 몸도 좋고 못된 그 성질머리도 어떨 땐 귀엽게 느껴졌다. 그 사람 옆에선 잠도 오래 잘 수 있었고 마음이 따뜻했었다. 우리가 함께 하기로 한 날부터 난 죽 그를 사랑했고 더 키워왔다. 그가 멈춘 걸 알았을 때도 난 여전히 그랬다.
오스트리아에 오기 전, 우연히 뿌리와 날개라는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독일남자과 결혼했다가 배신당한 여자의 글. 그 글을 읽으면서 설마 내게 같은 상황이 올 거란건 꿈도 꾸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특별한 계기로 만나 특별한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내 인생이 내 미래에 이 남자와 함께하는 그림이었다. 지금 난 마음이 텅 비었고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가 어제 그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이제 그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숨길 필요도 없다.
3일 뒤에 난 인도로 다시 간다. 이번 인도행은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굳이 꼭 인도를 다시 가서 요가를 더 배워오면 내 미래에 도움이 될 거 같다며 남자친구는 내게 돈까지 입금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싶다는 그에게 나는 고맙다고 했고 언젠가 꼭 갚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인도 갔을 때 이 여자가 집에 왔었단 사실과 둘이 깊은 관계가 되었단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 시간을 또 내어주는 꼴이 된다.
내 첫 번째 이혼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꼭 관계를 정성스럽게 키워가고 싶었다. 경험이 있으니 같은 실수를 안 하려 했고, 더 이해하는 마음으로, 더 여유로운 대처로 어떤 상황이든 둘이 같이 꼭 붙어서 풀어나가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인생에 동반자, 서로에게 부모가 되는 그런 관계.
지금 그는 왜 본인이 내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자기 공간에 있어야만 하는 내 처지, 말이 안 통해 그의 도움이 절실한 내 처지,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이 또한 그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이 부담스러운 한국 여자를 이제 짐처럼 여기는 그 사람.
난 오늘 그가 없는 동안 집청소를 했고 이불을 개고 정리하면서 집안 곳곳에 우리 둘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 하나하나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 곳곳에는 내가 그린 우리 둘만의 캐릭터로 이야기가 담긴 작은 종이조각들이 붙여있다. 내가 처음 사기 시작해 이제 9 식구가 된 베이베들이라고 불렀던 인형들. 그 인형들이 놓인 침대는 이제 그 남자만 누울 수 있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자는 처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건 사랑이 아닌 걸까. 이 미련한 사랑을 끝낼 방법은 내가 떠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며칠 전 난 세 번째 비자결과 통지서를 받았다. 이 거주권은 이곳에서 3년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게 받기 힘들었던 첫 번째, 두 번째 비자와는 다르게 이번건 한 달 만에 결과가 나왔다.
“너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가 다른 만남을 하는 걸 너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집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허락할게, 나가라는 말은 안 할게. 너 그렇게 할 수 있지? 어?”
난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는데 알았다고 했다. 언젠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길 때쯤엔 나도 어느 정도는 이곳에서 나만의 삶을 꾸려나갈 기반을 마련하겠지.. 그럼 이 남자가 내게 다시 마음이 올 수도 있겠지 생각했다. 바보 멍청이처럼. 그 여자와 이미 시작한 것도 모르고,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했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좋은 남자로 남겨졌으면 했나 보다. 이 만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량한 이 야무진 꿈을 가증스럽게 품고 있었나 보다. 욕구충족을 다른 쪽에서 하며 나와는 익숙함을 여전히 누리고 싶었다보다.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가슴속에서부터 내려와 발가락 하나하나 근육을 움켰다 펴고 온 힘을 끌어내서 물어봐야 했다. 불편한 진실을, 그 진실을 숨기고 있었단 걸 드러내 그가 민망해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가 언젠가 나를 생각하며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나라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은 것에 대해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 아픈 관계에서 빠져나올 힘을 길러야 한다. 내 사랑은 미련한 게 아니라 말하고 싶다. 난 언제나 그저 진실하게 깊게 푹 사랑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