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마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장마가 아니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바람에서 비 냄새가 난다.


사람도 반평생을 살다 보면 코가 예민해지는 모양이다. 코가 예민한 가축이나 짐승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기에 관한 한 거의 직관적으로 느끼게 되는 듯하다. 남편도 나도 아침부터 부는 낮고 느린 바람에서 비 냄새를 맡았다. 며칠 전부터 들어온 장마 예보와 바람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습한 느낌 때문이었다.


저녁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이며 예상 강우량은 150mm라고 한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주말을 맞았고 주말을 이용하여 텃밭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심어만 두고 거두지 못해 얼려 죽였던 몇 해 전이 떠올랐다. 이번엔 얼려 죽이는 대신 썩혀서 버리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달하지 않기로 했다. 심었으니 거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심은 것으로 만족할 때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거두지 못했던 한 번의 경험이 나를 무디게 만들었거나 무뎌지려고 무던히 노력 중일 수도 있었다. 속으로 누르면서 누르는 티조차 내지 않는 내가 참 무던해졌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텃밭은 완전히 망초 꽃밭이었다.


지난해엔 망초가 씨앗을 맺기 전 깔끔하게 쳐 주었다. 올 5월 5일에도 망초가 우거지기 전 예초기로 잘라 주었다. 그럼에도 밭은 발 디딜 자리 없이 망초로 뒤덮여 있었다. 작물 거두기는 뒷전이고 망초부터 쳐 내야 한 발이라도 디딜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남편이 예초기 돌릴 준비를 하는 동안 낫으로 컨테이너 박스 앞 망초부터 잡았다. 올해는 봄부터 비가 자주 온 덕분에 뿌리째 뽑히는 망초도 제법 많았다.


마늘은 꽃대 끝에 더러는 주아를 달고 있기도 했으나 마늘 대가 사그라진 것들이 많았다. 대를 쭉쭉 잡아 뽑으면 될 마늘 수확을 마늘 심었던 줄을 더듬어 일일이 캐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호미를 부르는 마늘 캐기가 되었다. 남편이 마늘밭에 우거진 망초를 예초기로 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여긴 그냥 두세요. 가뜩이나 마늘 대가 녹아 버려서 마늘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아냐, 당신 힘들어서 안 돼요."

"그 당신 좀 힘들게 살고 싶다잖아요. 잘 살펴서 망초 뽑으면서 마늘 캐 볼게요."


어쩌자고 오늘 둘이 함께 같은 자리에서 일을 시작했나 보다. 서로 대각선 끝에서 시작해서 중간쯤에서 만나냐 하는데 오늘은 우거진 망초대 때문에 일단은 같은 자리에서 시작할 수밖에 도리가 없기도 했다. 남편이 망초대를 치면서 지나가는 동안 마늘 주아까지 모두 쳐 내 버렸다. 주아만 따로 모라 이번 가을에 심을 예정이었다. 좋은 마늘이 나오면 그 주아만 모아 씨앗으로 삼으려던 내 아주 작으나 한편으론 아주 큰 꿈을 남편이 순식간에 조각내고 말았다. 흩어져 나간 마늘 주아까지 풀 더미 속에서 뒤져 찾고 싶지는 않았다.


유기농으로 몇 해 가꾸던 텃밭 작물들을 이제는 가능하면 땅도 일구지 않고 가꿔보기로 한 지 몇 해가 지났다. 퇴비에 연연하지 않고 텃밭에서 나온 풀이나 잔사 정도로만 모든 작물을 키우면서 오는 만족감 또한 크다. 심을 때는 대충 파서 심은 마늘을 수확할 때 땅을 일구게 생겼다. 남아 있는 마늘 줄기를 더듬더듬 찾아 대강 줄을 맞춰 심은 대로 호미질을 했다. 마늘 200개를 심어 백여 통 수확했다. 그것도 땅을 일궈가면서.


남편이 미안한지 한 마디 한다.

"우리가 자주 안 와 봐서 그렇지."

아직 토라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흰 감자도 홍 감자도 한 길에 가까운 망초대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실파만이 망초와 키재기를 하듯 우뚝 자랐다. 아니 완연한 대파로 탈바꿈을 산 상태였다. 그러나 잎에는 굴파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위로 밑동 근처를 잘랐다. 잘라내도 올가을 김장 무렵까지는 또 잘 자라 있을 게 파다. 실파 두 단 심어 대파 열 단으로 키운 것이다. 벌레만 끼지 않는다면 대파 농사가 괜찮아 보인다. 텃밭에 자주 오던 때는 당근 농사가 당근 당근이라 했던 나는 그 새 대파 농사가 대박이라 설을 풀고 있었다.


울금과 토란, 생강들도 풀을 잡아주자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는 듯 작은 몸을 드러냈다. 집에서 화분에 키우는 울금은 벌써 잎을 세 장째 내는데 텃밭에선 겨우 한 장을 말아 올리는 중이다. 해는 물론 식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지만 풀 잡아주는 일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함을 깨닫는다.





대파를 다듬었다.


그대로 집으로 들고 들어오기에는 대파 잎에 낀 벌레들이 께름칙하기 그지없었다. 바람이 휘익 지나갈 때마다 비 냄새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감하게 벌레 먹은 자리를 잘라내며 다듬어도 돌아서서 보면 또 벌레 먹은 자리가 보인다. 지금 막 새로 얼굴 내미는 여린 잎에 생긴 벌레 자국은 나는 지나치게 연한 어떤 것에 이런 짓을 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했다.


꾸지뽕도 오미자도 열매는 보여주고 있었다.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망초꽃들 사이로 아기 주먹만 한 탐스러운 분홍 꽃 하나가 보인다. 두메부추 꽃인 듯하다. 베란다 화분에서 피었다 진 두메부추 꽃은 실한 씨앗을 한 톨도 남기지 않았으나 텃밭 두메부추 꽃에는 여전히 꽃이 터지는 중에도 불구하고 거뭇거뭇 씨앗들이 보인다. 야호다. 토마토는 푸른 것들까지 거의 떨어져 있고 기대하고 심었던 여주와 오이는 싹도 트지 않았는지 흔적도 없다.


키위는 세 개, 보리수는 주렁주렁, 버찌도 아직 매달려 있었다. 누구든 와서 따 갈 수도 있을 테고 새들이 따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밭 위쪽으로 집을 지으려는지 장비 움직이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번갯불에 콩 볶듯 일을 마쳤다. 12시 20분이다. 점심으로 먹기로 한 라면은 나중으로 미루고 집으로 향했다. 바람은 비 냄새만 실어 나르는지 집에 도착해서 콩국수로 점심을 해결한 후에도 두어 시간 지날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드디어 장맛비가 시작되었다.


약속이 있다며 외출했던 남편은 신발과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왔다. 이번 장마 통에는 마늘 정리를 하면 되겠다.


쪽수가 많은 마늘들은 흙을 털어내고 물에 담그고 마늘 주아를 심어 수확한 통마늘과 육쪽 오 쪽마늘은 따로 분류했다. 마늘 주아를 심어 얻은 통마늘과 육쪽, 오 쪽마늘들은 돌아오는 가을에 씨앗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통마늘은 내년 봄 쪽마늘로 자라 있을 테다, 가능하면 육쪽이기를 바란다. 육쪽과 오 쪽마늘들도 쪽수 많지 않은 마늘로 자라 있기를 기대가 부푼다.


늦었지만, 내 맘에 쏙 들게 텃밭 일을 마무리한 날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족하다. 먼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고 가야 할 길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가다 보면 그 먹구름은 어느샌가 흩어지고 맑은 하늘을 만나라 수도 있다. 비가 되어 내린다면 맞아주면 될 일이다. 시작은 반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며 반을 갔다 해도 여전히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끝이 나 봐야 끝이듯 말이다. 장맛비가 아직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비 맞는 일 없이 텃밭에 다녀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열 돔 굽이굽이 펼 황진이는 어디 계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