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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는 호박나물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장마가 제주도에 도착한다는 토요일 낮에 텃밭에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한 장맛비가 일요일까지 우리나라 전역에 내릴 거라는 예보를 들은 들은 덕분이다. 게다가 우중 텃밭 일은 수고로움만 더할 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 37년 만의 7월 늦은 장마를 아무 걱정 없이 지켜볼 수 있음은 어제 텃밭에 다녀온 덕분이기도 하다.


장맛비를 맞기 전인데도 수확 시기를 놓쳐 줄기가 거의 삭아버린 마늘을 구분했다. 주아를 심어 나온 통마늘과 쪽수 적은 마늘들은 가을에 다시 심어 쪽마늘과 육쪽들로 키우기로 하고 쪽수가 많거나 자잘한 것들은 처음부터 아예 물에 담갔다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풀을 잡아 주었으니 토란과 생강과 울금의 자라는 속도에 가속이 붙을 것이다. 부디 풀보다 우거지기를 바란다.





무슨 약속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지 우중에도 외출했던 남편이 부스럭거리며 들어왔다. 손에는 지난번에 보았던 것과 같은 커다란 투명 셀로판 봉지가 들려있다.

"아, 지난번에 상추 나눠주었던 위층에서 또 주시네. 빗속을 뚫고 주말 텃밭에 다녀오셨대."

마늘을 까다 말고 남편이 내미는 봉지를 살폈다. 상추와 가지, 양파에 중간 정도 자란 호박 반 통까지 들어있다.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요일 장맛비 속을 뚫고 텃밭에 다녀온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다. 주말마다 텃밭 가던 날의 재미와 마음을 이웃을 통해 새삼 반추한다. 상추와 가지는 물론 양파와 호박도 모두 큼직하게 잘 키우셨다.


"상추 고갱이 버리지 말고 꼭 먹으라는데."

상추 잎보다 상추 고갱이에 특별한 뭔가가 있는지는 모른다. 남성에게 좋은 뭔가가 상추 잎보다 고갱이에 더 많은가? 상추 고갱이에 대한 상식도 없고 상추 고갱이는 또 먹어본 적도 없다. 공들여 키웠으니 고갱이에 들어 있는 공도 버리지 말고 먹으라는 뜻인가 보다 했다. 상추 고갱이가 굵은 쪽은 2cm에 조금 못 미친다. 무얼 먹이기에 이렇게까지 상추 고갱이가 굵을까? 사실 나는 너무 큰 모든 것들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 있는 편이기도 하다


이번 상추는 비를 맞았으니 키가 커서인지 지난번처럼 흙이 튀어 오르진 않았다. 잎들만 떼어 빗물이 마르도록 종이 위에 펼쳤다. 흙이 튀어 올라 묻어 있다면 씻어야 하지만 깔끔한 상태이니 물에 씻어두는 것보다는 말려서 보관하는 것이 보관 기간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커다란 상추 고갱이가 세 개가 합해 놓으면 웬만한 작은 무 정도가 될 듯하다. 특별히 상추 고갱이 조리법을 몰라 상추 고갱이를 반으로 갈라 깍둑 썰어 상추 고갱이 깍두기를 담갔다. 날것으로 먹어보니 괜찮다. 조금 익혀서 남편에게 권하기로 한다.


부러지던 비 맞은 상추는 물기가 마르자 부드럽고 부피도 줄어 신문지에 싸고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남편과 내가 앞으로 세 번은 더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상추 잎이 큰 것은 반으로 갈라 먹어도 내 잎에 들기에는 부담스러우니 상하기 전에 상추쌈을 부지런히 먹어야겠다.





반 갈라져 온 호박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사실 된장국을 맛있게는 먹으나 즐겨 만들어 먹지 않는 게 또한 된장국이다. 아무리 작은 뚝배기에 된장국을 끓여내도 다 먹게 되지 않는다. 된장국에는 뭐니 뭐니 해도 호박이 빠질 수 없다. 그런데 남편은 된장국에 들어간 호박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질 나쁜 식습관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내 손으로 한 뼘 반 정도 자랐으니 25cm는 너끈히 넘을 크기다. 호박 나물이나 해 먹자고 일단 호박 속을 싹 파냈다. 껍질 부분부터 서너 켜가 되도록 얇게 저며냈다. 보기엔 부드러워 보이는데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호박 껍질이 벌써 늙기 시작한 모양이다. 안쪽 살집에 박힌 씨앗들도 대강은 호박씨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아깝다. 그냥 두었다 늙은 호박으로 땄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애호박도 아니고 늙은 호박도 아니고 어중간한 나잇대의 인간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꼭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하다. 다 자라면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자라는 장호박 종류로 보인다.


채를 썰어 소금물에 살짝 헹궈내고 새우젓 새로 꺼내 호박나물을 만들었다. 맛이 없다. 푸른 껍질이 붙어 있는 쪽은 질기고 안쪽은 무른데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무지근한 식감이다. 손맛 부족인가 싶어 들기름을 듬뿍 넣고 파 마늘도 더 넣었다. 호박이 불 맛을 보았는데도 풀 죽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더 맛이 없다. 애호박으로 만든 호박나물 맛과는 천지차이다. 이 역시 두어 번은 더 볶을 수 있는 양이 남았다. 어쩌나? 볶아서 비빔밥 고명으로나 올려야겠다.





호박나물은 애호박 나물이 최고다.


호박에 봉지를 씌워 애호박으로 키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 애호박 키우는 이가 나와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잘 자라는 호박의 특성상 하루만 수확 시기를 놓쳐도 상품 가치를 잃는다며 애호박 수확 시기의 고단함과 보람이 동시에 묻어나는 말을 했었다.


소용 가치가 있는 시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어느 시기 이상이 되어야 학습도 가능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운다. 그리고 또 어느 시기가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다음 세대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 호박 하나가 주황의 꽃을 피운 후 여물어 단단해져 가듯 인간도 꽃이 피었다 진 후에는 살갗이 조금씩 질겨지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서글퍼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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