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도라지 캐러 간 바구니 속에
나리꽃 메꽃이 웬일인가요
랄라랄 랄랄라 랄라랄 랄라
랄랄라 그러게 여름이죠
풋고추를 씻어 물기 빠지도록 바구니에 펼치며 혼자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기보다 흥얼거림이었다. 노래 가사는 도라지 캐러 가서 해찰 부리며 노느라 나리꽃과 메꽃을 꺾어 담은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씻어 말리려는 이 풋고추는 해찰이 아닌 전혀 엉뚱한 일의 결과로 인해 억지로 따낸 것일 수도 있었다.
남편이 점심 초대를 받고 나갔다. 다소 귀찮을 수 있는 일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의 표시였다. 두 분이 만나 무슨 소설을 쓰셨는지 저녁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에야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 손에는 검은 종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종이 쇼핑백 안에서 통닭 한 마리와 풋고추를 가득 담은 검은 비닐봉지가 나왔다.
"웬 통닭에 풋고추예요?"
"**씨가 준 거야."
"우리가 텃밭에 아무것도 가꾸지 않는다고 소문났나 보네. 만나는 사람들마다 텃밭 작물들을 보내시니."
"그러게, 요즘 웬만하면 다들 텃밭들을 가꾸더라구. 우리가 좀 일찍 텃밭을 시작한 거지. 일찌감치 맛보고 지금은 거의 접었지만 말이야. 지금 열성인 사람들도 조금 있으면 우리처럼 접는 이들이 많이 생길 거예요. 웬만큼 힘들어야지."
"우리도 그랬잖아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근데 풋고추를 이렇게나 많이 보내요? 그냥 두면 붉게 익을 것들이 많아 보이는데 모조리 따 버렸네."
"김장 심어야 하니까."
"오, 그렇네. 김장 배추 심을 철이네. 우리도 이달 말쯤 갓이랑 쪽파, 시래기 무 정도는 심어야지 않을까?"
"난 안 심고 싶어요."
심지 않으면 거둘 게 없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남편은 이제 텃밭 일에 이골이 났다. 농사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을 땐 이웃에 물어가며 열심히 흙도 파고 유기농 퇴비도 만들더니 다 알고 난 지금은 심드렁해졌다.
입을 닫아건 내게 남편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 마디 던졌다.
"걱정 말아요. 시래기무는 몰라도 갓과 쪽파는 찬바람 나는 9월 초에 심어도 되잖아. 사실 이 풋고추는 사연이 있어. 그 친구는 지난번에 내가 일 도와준 보답으로 옥수수 한 박스 건네면서 생색 낼 생각이었대. 그 친구의 친구가 옥수수를 많이 심었다나 봐. 주말에 옥수수 따러 가재서 새벽같이 차를 몰고 따라갔다는 거야."
남편의 이야기인즉 이랬다.
그 친구의 친구는 꽤 큰 밭을 가지고 있대. 지난해 옥수수가 잘 돼서 그중 잘 여문 옥수수 몇 개를 씨앗으로 쓰려고 잘 말려 보관해 두었다는 거야. 올해 옥수수 파종 시기에 맞춰 받아둔 옥수수 씨앗을 일주일 간격으로 몇 번에 걸쳐 심었지. 그 친구의 친구도 우리처럼 농사를 좀 오래 짓다 보니 이력이 나서 심어 두고 거둘 무렵에나 가는 게 습관이 되었대. 요즘이 옥수수 철에 어제가 일요일이었잖아. 옥수수 먹을 사람들을 거의 모집하다시피 해서 밭으로 향한 거야. 신나게 옥수수밭으로 들어서서 옥수수를 땄겠지. 그런데 옥수수 알이 하나도 안 차 있더라는 거야. 미안해서, 옥수수 따러 온 사람들에게 실망을 준 게 미안해서 고추라도 몽땅 따 가라고 했대. 김장 배추 심을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푸른 고추가 주렁주렁한 고춧대를 모두 뽑아냈다는 거야.
내가 옥수수를 키울 때도 옥수수 알이 겨우 두어 개 달려 있는 성근 옥수수를 종종 만나곤 했었다.
"올해 이상 기후 때문에 과일들이 속이 제대로 차기도 전에 익어버렸대요. 수박도 그래서 가격이 엄청 뛰었다더라구. 나들이 삼아 갔을 테니 점심이나 한 끼씩 먹고 올 것이지 괜한 픗고추들이 나한테까지 왔네."
바람도 좋고 해도 좋은 가을 입구에 한 발 들어선 듯한 날, 풋고추 물기가 금세 말라 사라진다. 풋고추를 즐기는 이도 남편뿐이다. 임플란트를 해 넣은 이후 음식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남편을 위해 연한 것들로 몇 개 골라 냉장고에 보관해야겠다. 나머지는 이 좋은 볕과 바람에 바짝 말려두었다가 된장찌개 할 때 손으로 거칠게 바스러뜨려 넣으면 그 맛이 또한 일품이겠다.
풋고추 바구니를 걸어두고 돌아서며 얼마 전 위층 이웃이 나누어 준 노각에서 나온 노각 오이 씨앗을 살펴보았다. 씨앗이 탱글탱글 속이 꽉 찬 채 잘 말랐다. 흙에 씨앗을 묻는 봄부터 가을걷이하는 날까지 되뇌던 말이 있다.
"다시는 농사짓지 말자." 그러나 이 말은 돌아서면서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씨앗을 보면 언제든 내년 봄을 기약하게 되니 말이다.
옥수수를 심었지만 맹탕 옥소수 자루만을 수확한 그 누군가도 그럴 것이다. 옥수수 알갱이 하나 맺히지 않은 옥수수 대 뽑아내면서 '내년에 내가 옥수수를 또 심으면 내가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옥수수 아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벌써 잘 영근 옥수수 몇 자루 씨앗용으로 얻어 두었을 것임을. 크든 작든 텃밭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의 맛이다,
쿵더쿵 방아가 춤을 추는데
마실 간 누나는 왜 안 올까요
랄라랄 랄라랄 랄라랄 랄랄
랄라라 그러게 여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