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 돌연 일진광풍에 비가 몰아친다면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비바람 몰아쳐서 집에 갈 수가 없네."


귀가 시간인데 비 피하는 중이라는 남편의 전화다.

"여긴 비만 조금 오는데, 바람은 하나도 안 불어요."

"이 사람은 지금 날벼락같은 비 피하느라 무슨 마트 입구에 서 있구먼. 우산을 살까 하다 그만뒀어요. 우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야. 비 멎는 거 봐서 천천히 갈게요."

"알았음."


남편이 있는 곳과 집이 1km는 족히 떨어져 있으니 거기 오는 비가 여기는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전화를 끊는데 방문 하나가 쾅 닫혔다. 드디어 이곳에 바람이 도착했다. 바람뿐만이 아니다. 남편이 말한 그 비바람이 지금 이곳에 몰아치고 있었다. 황급히 작은방 창문을 닫았다.





일진광풍을 타고 비가 오신다.


멀고 가까움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온 공간을 채웠다. 우산 없이 지금 빗속에 든 이는 이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방금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특히 그렇다. 그나마 요즘은 정류장마다 지붕도 있고 장의자도 마련해 두어 잠시나마 비를 피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내리는 비는 지붕과 의자도 날려버릴 기세다. 순식간에 온몸이 젖을 것이다.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 당신 있는 곳 구름이 집까지 오는 데 30초 걸렸나 보네. 여기 지금 비바람이 장난 아니야.

- 여긴 비가 조금 덜 내리네. 우산 구해서 갈게요.

- 비 좀 맞고 와도 괜찮아요. 빗물에 오늘 하루 때 불리고 집에 와서 샤워하면 되지. 어차피 할 샤워인데.

- 여보시오, 난 이제 소년이 아니오. 더구나 머리카락 하나만 더 빠지면 완전 대머리요. 그래도 좋다면야.

- 그건 아니 되오. 비 맞지 마시오.





여학교 때였다.


교문을 나설 때만 해도 푸르던 하늘이었다. 버스를 바꿔 탔을 때까지도 괜찮았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면서 사위가 어두워졌다. 비가 올 기세였다. 집에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30분은 더 가야 하는데, 버스에서 내려서 논과 밭 사이로 난 달구지 길을 6~7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데 걱정이 되었다. 비 좀 그치게 해 달라고 당시는 믿지도 않던 신께 아쉬운 대로 기도를 드렸다. 여름철이면 언제 비가 올지 몰라 늘 가방에 넣고 다니던 우산이었다. 이 며칠 날이 맑아 하필 오늘 아침 우산을 꺼내 둔 줄 어떻게 아시고 비를 뿌리실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납작 부딪힌 빗방울 하나가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촤악 퍼지는 작은 감자전 만했다. 아니 큰 부침개 같기도 했다. 그러다 몇 개가 모여 맷방석처럼 하나로 붙어 버렸다. 차창 밖 모든 사람과 물건들이 제 모양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버스가 집 동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버스는 섰고 나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지금 비가 오고 내게 비를 막아줄 우산이 없어도 지금 나는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버스 문이 열리고 땅으로 내려서서 빗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부터 빗물이 줄줄 흘렀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아 속옷을 적시고 흰 양말을 신은 흰 운동화 속에 고인 빗물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칙칙 소리를 내며 새어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논밭을 가로지르는 달구지 길에는 나 외엔 아무도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책가방을 가슴에 안고 종종걸음을 쳐 달구지 길을 지나 집 입구 길로 접어들었다. 집 입구에는 쌀집이 있었다. 쌀집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따가웠다. 따갑게 느끼고 지나가도록 두면 좋았을 것을 그중 짓궂은 젊은 남자 하나가 한 마디 던졌다.

"용감하네."


이런 말을 이기는 방법은 무시하는 것뿐이다. 순간 호랑이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서 혼을 내 주리라 마음은 먹었지만 아마 이르지 않을 것임을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쌀집에 모여 앉은 무리들 중 한 사람이 하는 말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버스에서 방금 내렸나 본데."

"그런가?"


안 봐도 내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치지 않는 소나기와 바람에 단발머리에서는 빗물이 줄줄 흐르고, 흰 여름 교복 상의는 몸에 착 달라붙어 사춘기 소녀의 별 보잘것없는 몸매나마 다 드러났을 것이며, 휘휘 감기는 얇은 군청색 여름 플레어스커트는 허벅지를 감았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그날 몸살에 걸려 온몸의 뼈라는 뼈는 모두 분리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도 덕분에 지리 시간에 배웠던 우리나라는 강우는 지형성 강우에 속한다는 공부를 온몸으로 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늘이 말개지기 시작할 무렵 남편이 들어왔다.


우산도 없는데 비도 맞지 않았다. 마트에 들어가 어슬렁거리다 비가 그칠 무렵에야 나왔다고 했다. 세찬 비가 내릴 땐 어디든 피했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갈 길을 가면 된다. 불가피하게 우산도 없이 세찬 빗속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을 뿐이다.


인생 역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비 피할 겨를도 없이 비와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있다. 남편 말마따나 어쩌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소년기이기에 더욱 용감하게 빗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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