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행복이 주렁주렁한 감나무 아래를 걷는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올해도 아파트 화단 대봉감들이 꽃보다 곱게 물들었다.


모든 감꽃이 감으로 영그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감꽃이 피었다 지면서 감나무 아래엔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놀던 그 감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쌓인다. 다음으로는 꽃가루받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작은 감들이 떨어져 구른다. 세 번째로는 장마철이 지나는 동안 아이들 주먹 만한 풋감들이 떨어진다. 제 무게에 못 이겨 갈라지고 짓이겨지기도 하면서 아픈 소리를 낸다. 장마가 끝나고도 한동안은 꼭지가 여물지 못한 감들이 떨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웬만한 감들은 우리 입에 들어갈 준비가 다 된 듯 발그레한 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건강한 모습으로 나무에 달린 채 해를 받으면 홍등처럼 붉어질 무렵이 감을 따는 적기다.


입주 초기 몇 해 동안 가을 어느 한 날은 감을 따고 나누는 축제의 날이기도 했다.

"오늘은 감 따는 날입니다. 시간 여유 있는 주민분들께서는 구경도 하시고 감을 따실 수 있으면 따시면서 감 따는 날을 함께 즐기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듣고 나온 이들은 대부분 주부들이나 연세 지긋하신 여성 어르신들이었다. 남편 출근 준비와 아이들 등교 준비 등 부산한 아침 일을 마친 주부들이 아파트 화단 감나무 앞 잔디밭에 앉아 감 따는 모습을 구경도 하고 직접 장대를 들고 감을 따기도 했다. 개중엔 젊은데도 훈수만 늘어놓는 이가 왜 없었겠는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감 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목을 위로 향한 상태에서 기다란 대나무 장대를 들고 마음먹은 감을 정조준하는 것도 힘들지만 제대로 따지 못하면 바닥에 떨어진 감이 파삭 깨어져 버리곤 했다. 어린 날 고향에서 감을 따 봤다는 어르신이 대나무 장대의 벌어진 틈으로 감 가지를 집어넣어 부러뜨려야 온전하게 감을 딸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감을 따는 우리들 중 누구도 그대로 실천하며 감을 따는 이들은 없었다. 성미 급한 이들은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기도 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한 사람은 따고 한 사람은 받고. 온몸이 땀범벅이 되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들이 가을 하늘로 날아오르곤 했다.


그렇게 딴 감들을 집집마다 몇 개씩 나누는 수고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가끔 해걸이를 하는 해엔 감을 딴 노고는 뒤로하고 일정 연령 이상의 노인이 계신 댁에만 감을 나눠 드리기도 했다. 함께 감을 따고 나누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사를 갔다. 감 따는 날 쉬지 않고 훈수를 두시던 어르신들은 한 분 두 분 다른 더 편한 세상으로 드셨다. 그리고 새로운 얼굴들이 그 자리에 들어와 지내게 되었다. 감나무에 두어 개씩 남겨 둔 까치밥들은 겨울을 지나는 동안 털썩 떨어져 바닥에 흥건한 감물을 튀기기도 했다.





사람도 물과 같아 섞이며 흐른다.


처음 동네가 만들어지던 때와 같지는 않지만 새로운 얼굴들과도 섞이며 지내다 보니 눈인사 정도 나누며 지내는 사람이 제법 많아졌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가을이면 감 따자는 방송을 하지 않는다. 대신 몇몇이 알아서 감을 따고 그들끼리 알아서 나눠 먹는다. 감을 따는 동안 그 옆으로 지나갈 때면 몇 개씩 건네주기도 한다. 나도 운 좋게 감 따는 옆을 지날 때 받아온 감 서너 개를 바구니에 고이 모셔 두었다.


어디 시장에서 얼마를 주고 구입했다는 감 따는 도구를 들어봤다. 나 같은 사람은 손목 힘도 부실하지만 나이 먹은 티를 내기도 한다. 감 따는 도구에 끌려 나가자빠지겠다. 지나가는 사람 다치게 하지 않고 남의 유리창이나 깨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싶으니 애초에 감 따는 일은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다.


몇 해 사이 감 따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던 아낙네들 사이에 한두 사람 남정네들이 끼기 시작했다. 퇴직 후 쉬는 사람들이거나 낮 동안 쉬는 사람들이었다. 아낙네들끼리 감을 딸 때에 비해 감 따는 일이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이유인즉 방송을 하거나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감을 나누지 않으니 감을 모두 따지 않고 다음 타자를 위해 어느 정도는 남겨두기 때문이다.


물론 크고 좋은 것으로 따기 쉬운 자리에 있는 것부터 따기 시작한다. 다음날엔 다른 사람이 나서서 조금 위쪽의 따기 힘든 감을 딴다. 그렇게 감나무 맨 꼭대기에 걸린 몇 개의 감이 까치밥으로 남게 되기까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며칠에 걸쳐 감을 따는 것도 나름 운치 있고 서로 나누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감들이 유난히 많이 떨어졌다. 꼭지에서 분리된 감들이 화단 여기저기 붉은 점처럼 찍혀 있는 날도 있었다. 가을장마가 오래 지속된 탓이 아닌가 추측만 해 본다.


감을 따기 시작한 지 닷새쯤 되었나 보다. 매일 이른 아침 운동을 나가다 보면 경비 아저씨는 감나무 잎 쓰는 일부터 시작한다. 감나무 아래 떨어진 감잎이 수북하다. 그렇게 따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듬지에 가까이 열린 홍시가 된 감들은 이미 떨어져 납작쿵이 되어 있기도 하고 감 따는 도구에 제대로 걸리지 못한 감들 또한 땅에 부딪쳐 단단한 살이 사방으로 튀기도 했다.


몇 해 전 이사 온 눈인사 정도 건네는 이웃이 감 한 봉지를 건넸다. 감사히 받으면서도 많은 양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걱정 마세요. 다른 사람이 딸 거 충분히 남겨 뒀어요."

퇴근한 남편이 감을 깎는다. 맛보기 곶감으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양이다. 크기로 보나 색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가을의 대명사로서 모자람이 없는 과일이 감이다.


내가 젊어서 그랬듯 누군가는 조금 나이 든 내게 행복 한 바구니를 건네기도 하는 가을이다. 나는 오늘도 행복이 주렁주렁한 아파트 화단 감나무 아래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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