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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Nov 29. 2021

소설에 나는 우렁각시가 되었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눈뜨자마자 베란다로 나갔다. 새벽에 내리던 비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였다. 비는 그쳤고 동녘 하늘엔 햇살에 물든 주황빛 구름이 가로로 길게 걸려 있다. 새벽의 비가 눈으로 변한 흔적이나 빙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리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렸다.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일기 예보가 딱 들어맞았다. 베란다 안팎의 기온 차가 크니 화분에서 올라온 수분이 온통 유리창에 가 앉은 것이다. '소설 추위는 꾸어다가라도 한다'라는 속담 그대로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외출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두툼한 셔츠를 권했다. 

"오늘 서울 최저 영하 3도래요. 횡성은 서울보다 2~3도는 더 낮을걸."

남편이 셔츠 위에 겨울 외투를 걸쳤다. 


남편은 오늘 몇 년 전 홀로 되어 횡성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 다녀올 예정이다. 모두 사형제인 남편의 형제들 중 위 두 분은 몇 년씩 차이를 두고 먼저 가셨다. 아래 두 형제만 남았으니 애틋한 마음이 남다를 만도 하다. 얼마 전 시아버님 기일에도 형제가 함께 묘소에 다녀왔다. 그때 동생이 오랜만에 골프라도 한 게임 하자며 한 번 다녀갔으면 했단다. 남편이 언젠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려서는 동생이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귀찮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의젓하게 변한 동생이 마냥 신기해 보였단다. 남편의 이 말은 형이나 언니들이 과거를 떠올릴 때면 자주 입에 올리는 동생들에 대한 아름다운 푸념인 동시에 추억이기도 하다.


형제가 오랜만에 운동도 하고 맛난 것도 드시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시기 바란다.





창에 서린 김을 몰아내기 위해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람이 확 몰려들었다. 춥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화초 정리를 하기로 했다. 어제 물을 주었으니 화분 흙이 물을 더 받아들일 준비도 잘 돼 있다. 가지를 자르고 물을 흠뻑 준 다음 비닐로 화분을 무장시키면 내년 봄까지는 대체로 물 주는 걸 잊어버려도 된다. 간혹 시들거리는 것들에게만 물 보충을 해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일단 목장갑을 끼고 돗자리부터 펼쳤다. 구아버 가지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한두 가지만 남기고 싹둑 쳐내 돗자리 위로 던졌다. 자르고 다듬는 일은 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 남편의 숙제로 남겨 두기로 했다.


조금만 쳐낼 생각이었던 깔라만시도 원줄기만을 남기고 시원하게 쳐냈다. 무성해진 잎에 가려 새로 가지를 벋은 자리마다 응애가 끼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여름 내내 문을 열어 두었을 땐 보이지 않던 응애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문을 닫아 두는 날이 많아지자 갑자기 성한 듯하다. 새 순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으니 시원하게 쳐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깔라만시 두 그루와 석류 한 그루에서 잘라낸 가지가 큰 비닐봉지로 하나 가득이다. 





가지치기를 끝내고 크고 작은 화분마다 비닐 씌우기 작업에 들어갔다. 베란다 유리창에 김 서림 방지도 할 겸 작으나마 베란다에서 지낼 식물을 위한 월동 준비다. 화분 크기에 맞는 비닐을 재고 높이에 맞춰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는 사이 허리도 아프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머지는 내일로 미루고 더 늦기 전에 오늘의 걷기 운동을 하기로 했다. 10여 분만 걸으면 몸을 흥건히 적시는 땀은 해가 낮게 눕기 시작하면 바로 한기를 몰고 오기 때문이다. 간단히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안에서도 바람 소리가 크게 들리기는 했으나 걷다 보면 열이 나고 땀이 날 거라는 생각에 옷을 너무 얇게 입었었나 보다. 둘레길 한 바퀴를 돌아도 몸에 열이 나기는커녕 가슴이 답답한 듯하고 장갑을 낀 손이 점점 더 시려왔다. 재빨리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걸어 올랐다. 


7~8층쯤 오르자 겨우 손 시림 증상이 가셨다. 두 시간을 천천히 계단 오르기만으로 운동을 마무리할 무렵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케이티엑스 타려고 횡성역에서 기다리는 중. 곧 도착한답니다."

"케이티엑스?"

"저녁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 좋아하는 물회 들고 달려갑니다."


물정에 어둡다 못해 촌스러운 나는 KTX가 서울에서 부산까지만 운행되는 줄 알고 있었다. 아니란다. 횡성도 KTX를 타고 오갈 수 있단다. KTX를 타고 가 본 데가 부산과 그 근처 외엔 없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내 무지가 하늘을 찌른다. 





저녁 준비를 하지 않으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물회 생각에 입안에 고이는 침을 꿀꺽하며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작은 화분 몇 개와 아주 큰 화분 대여섯 개를 비닐로 마저 씌웠다. 일을 끝낼 무렵 남편이 도착했다. 


물회는 여러 재료를 낱낱이 포장해 가지고 왔다. 여러 재료를 한 데 넣으면 먼 길 가는 동안 물회 본연의 맛을 잃을 수도 있다는 횟집 주인님의 배려였단다. 

"당신이 물회 좋아한다고 강릉까지 가서 당신 시동생이 사준 거야."

"우리 시동생이 사 보내서 그런가, 물회가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살살 녹네."


저녁 식사 후 남편 등을 밀고 훤해진 베란다로 향했다.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오늘 낮에 우렁각시가 다녀가셨남?"

나도 지지 않고 남편 앞에 구아버 가지를 대령한다.

"동생이랑 재밌었지? 횡성까지 가서 동생이랑 둘이서만 놀고 온 벌이야, 형님 숙제. 손가락 길이로 잘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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