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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Nov 25. 2021

씨앗 뿌린 기억도 없이 알곡을 받아들고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이 며칠 베란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올여름 역시 보내 버린 화초들이 많아 빈 화분도 늘었다. 흙만 따로 빼 두고 낡은 화분들도 모두 처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가을이란 계절적으로 꼭 가을만을 뜻하지는 않는 듯하다. 말끔한 갈무리와 뒷정리를 하는 그때가 바로 가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대여섯 해 전만 해도 베란다 정리는 하루에 다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어느 하루 베란다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던 일을 마치지 않고는 밥 먹는 일조차 꺼려 하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그러니 일이 끝나면 몸살을 앓는 건 당연했다. 손바닥 만한 베란다에서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치우고 다시 늘어놓는 일이 나만의 행사를 어느 정도는 즐겼다고도 할 수 있다. 정리하고 나면 정리한 자리를 바라보고 또 들여다보며 만족감에 젖어드는 기분은 정리를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맛이다. 겨울이란 보내고 맞이하는 데 손이 많이 가는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을 보내는 봄에는 봄대로 겨울을 맞이하는 가을에는 가을대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말이다. 


어제는 점심 후 둘째에게 택배 보내고 마트 한 바퀴 돌아오자 세 시가 훌쩍 넘었다. 걷기 운동은 시작도 못 했는데 시간은 저 갈 길로 잘도 흘러가 버렸다. 도대체 시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누가 이것을 풀어낼 수 있다면 노벨상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한 상을 받아야 하리라.


그제 잘라 펼쳐둔 구아버 가지 잎들이 시들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말려서 사용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친구에게 주기로 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싱싱할 때 건네는 게 맞겠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에 약속 있어요?"

"오늘 딸이랑 10시 반에 만나서 이케아 가려구요."

"그럼 지금 바로 갈게요."

"왜? 나중에 와요. 차라도 한 잔 해야지."

"그저께 구아버 가지 잘랐는데 시간이 안 돼서 오늘 가려구요. 가서 전화할 테니 잠깐 나오기만 하세요."

"아니 그래도......"

"딸내미랑 외출 준비하고 계세요. 오늘 남편이 시간 있어서 태워다 준대요."


입고 있는 옷 위에 긴 외투를 걸치고 부리나케 달렸다. 출근 시간이라 차가 밀릴까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차들이 잘 빠졌다. 엊그제는 친구가 우리 집 앞으로 지나간다면서 전화를 걸었다. 얼굴도 못 보고 지내는 요즘 상황에 둘이서 긴 한숨을 몇 모금씩 보태기만 했다. 오늘 아침 부스스하기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일 년 반 만에 보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 더 반갑다.


구아버 가지가 든 종이봉투를 건네면서 처음이니 몇 잎만 넣어 끓여 마셔 보면서 가감하라고 알려 주었다. 구아버 열매 하나와 주먹만하게 뭉친 알루미늄도 건넸다. 

"씨앗 심어 봐요. 노랑구아버 씨앗잉요. 나도 씨앗부터 키웠는데 올해 열매를 많이 달았어요. 이번에 자른 건 5년 이상 키운 거라 약성도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알루미늄 포일을 이렇게 뭉쳐서 싱크대 배수구에 넣어 두면 물때가 안 생긴데요."


그녀도 봉지를 건넨다.

"알았어요, 이거 들기름. 이모가 나눠 먹으라고 한 말 짜서 보냈어요. 자기 거라고 빼 뒀는데 못 만나서 못 줬잖아요. 잘 됐다. 이건 짜 먹는 밤 잼이고 이건 요구르트. 낭군님이랑 드시면서 가시라고."


'안녕' 하고 돌아서는데 친구 품에 안긴 반려견 코코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가 진행되면서 진득하게 누구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시간은 없고 마음만 급했나 보다. 재빨리 다시 돌아서서 코코에게 아는 체를 했다. 제 이름을 듣자마자 코코는 친구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몇 해 전 친구는 딸내미 청으로 아는 이에게 반려견 한 마리를 부탁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반려견이 하필이면 강아지 공장이 고향인 아이였단다. 병치레가 잦은 코코를 친구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눈 수술에 다리 수술, 정기 검진 등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때로 30분 간격으로 코코 눈에 안약을 넣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친구 말을 들었을 때는 친구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반려견을 키울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람이다. 반려견은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키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 친구가 보낸 고구마가 도착해 있었다. 화원 운영을 하면서 올해는 고향인 부안에서 농사도 짓는다고 한다. 코로나는 참 여러 곳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코로나 전에 비해 화원 운영이 쉽지 않은 탓이다. 동창들 대소사에 등장하는 고운 꽃들은 거의 이 친구가 운영하는 화원에서 자라는 꽃들이다. 우리 둘째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먼 데서부터 난 화분을 들고 부인과 함께 우리 집까지 찾아와 축하해 주기도 했었다. 


고구마는 잘못 보관하면 잘 상하는 식품이다. 고구마를 상하지 않게 보관해 가며 먹으려면 고구마가 서로 닿지 않게 신문지를 깔아가며 한 켜씩 쌓아 보관하되 기온이 너무 낮은 곳은 피해야 한다. 고구마의 고향은 따뜻한 지방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가꾼 고구마를 보낸 남편 친구와 그의 가족 소식이 궁금해졌다.


"우리 언제 한 번 부안 다녀오면 어때요?"

"좋지. 채석강에서 가까우니까 겸사겸사 한 번 가지."

"예전에 추석 전날 채석강에 놀러 갔다가 음식점 주인한테 눈총 받았잖아. 불륜 아닌가 하던 그 눈초리."

"그 음식점도 다시 한번 가 볼 겸."

"아니 나는 시골집 알아보려면 전혀 모르는 데보다 아는 사람 있는 데가 나을 것 같아서. 바닷가도 가깝고 이렇게 고구마를 키울 수 있다면 밭도 있을 테고."

"부안이 살기에 좋은 데지."

"물고기도 직접 잡아 먹고 푸성귀도 직접 키워 먹기엔 완전 백 점?"

"백오십 점. 세상 무엇이든 먹는 걸로 안 통하는 게 없으니까."


물론 언제 가보게 될지는 미지수다. 나이는 들어가고 그에 따라 몸은 젊었을 때와는 달리 마음처럼 날쌔게 움직여 주지 않고 그 친구가 부안에 있는 날 우리가 시간을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언제 한 번'이 가까운 어느 날이기를 바랄 뿐이다. 





막 걷기 운동을 나서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난처한 표정이 역력하다.

"아 참 이거."

"왜?"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뭔데요?"


꿀이다.

"웬 꿀?"

"얼마 전부터 차에 넣어 두고 계속 기회를 봤는데 내가 매번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서 못 주셨대. 오늘 마침 내가 혼자 있어서 주신다고 차에 가서 얼른 갖고 오시더라구."

"누가?"

"경비 아저씨."

"아니 경비 아저씨가 왜?"

"그냥 나한테 주고 싶은 마음이 드셨대."

"아니 왜? 왜 그냥? 당신은 왜 또 그냥 받아오고?"

"아무려면 옳다꾸나 하고 냉큼 받아왔을 리가 있겠어요? 아저씨가 다른 사람들 본다고 어서 갖고 올라가라고......"





남편은 얼마 전 애써 가꾸어 거둔 키위를 보내 준 친구에게 보낼 자그마한 선물을 사 왔다. 나는 그 옆에 곁다리로 내가 그린 키위 그림 액자를 넣기로 했다. 


내 친구가 건넨 들기름과 남편 친구가 보내온 고구마는 그동안의 친분으로 보아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친분도 씨앗의 일종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꿀을 건넨 분은 우리 동에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니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생각이 깊어진다. 우리가 뭔가를 더 자주 건넸어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왜? 

도대체 왜?

경비 아저씨 친척 분이 꿀벌을 치시나? 그래서 한 통 팔아주시는 건가? 우리한테 꿀 한 병 사라고 하시지......


세상 모든 알곡에는 씨앗을 뿌리고 키우며 거두는 수고가 따르게 마련이다. 수고 없이 마음에 품은 적 없는 귀한 알곡을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면? 어떤 선물을 언제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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