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미 Dec 21. 2021

명자 씨, 명자 이쁘지?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명자 씨, 얘 이름이 뭐게?"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 명자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몰라. 일단 들어와요, 언니."

"들어가긴. 코로나 시국에 남의 집에 들어가면 앙돼요. 얘 주려고."


명자 씨네 현관문 밖에서 몇 마디를 더 나눕니다. 

"무슨 세상이 한 잔도 같이 못 마시게 하네."

"그러게, 조만간 오늘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오겠지."

"근데 얘 이름이 뭔데?"

"자기 이름하고 같아. 명자."

"명자? 이쁘네."


명자 씨 얼굴이 환해집니다. 






아파트 단지 둘레길을 도는 중에 명자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잎이 다 떨어진 명자나무에 달랑 한 개 명자 열매가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긁힌 자국 하나 없이 곱게 자라 익었습니다.  


우리 밭에도 명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가까운 우리 밭 명자는 이름은 같은 명자이지만 새들에게 쪼이고 긁혀 울퉁불퉁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상처 받은 모과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죠. 더구나 우리 밭 명자는 나이 들어서도 가시도 많고 정염을 끊지 못한 검붉은 색 꽃만 피지만 단지 내 명자는 가시도 없고 연분홍에 흰색이나 주황도 어우러져 속마음까지 몽글몽글 부드러워질 듯한 꽃을 피웁니다. 열매에서 꽃을 보는 마음은 꽃 좋아하는 이들이 품는 작은 욕심일 수 있습니다. 


명자 열매를 땄습니다. 명자 열매는 겨울이 지나는 동안 수분이 빠져나가 약간 쭈글거리긴 해도 아주 볼품없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수분이 많지 않은 열매들의 특성일 것입니다. 겨우내 곁에 두고 감상하다 고운 모양이 변할 봄이 되면 자르고 씨앗을 얻을 생각이었죠.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운 다음 우리 밭 명자 곁에 심어 두고 가지각색의 명자꽃으로 어우러질 어느 날을 미리 상상했습니다. 


홍산마늘 주아가 자라고 있는 투명 페트병 위에 명자를 올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침 햇살이 명자 속살을 뚫을 기세로 강하게 들어 명자는 더욱 이쁜 색을 뿜었습니다. 그때 명자 씨 생각이 났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물론 코로나가 시작한 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함께 차를 나누던 몇 안 되는 이웃입니다. 그녀는 7~8년 전쯤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쩌면 남편이 남긴 그 마지막 말 '미안하다'는 말이 주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젊은 날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게 하는 큰 눈에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물론 올리비아 핫세의 이마를 가진 그녀에게서 그녀의 젊은 날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허리가 불편한 그녀는 허리 수술을 받은 후 그 후유증으로 요즘 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 밖에서 마주칠 때면 십여 미터만 걸어도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하는 요즘 상황을 토로하곤 합니다. 


이런 때는 그녀가 자주 끓여 주던 팥죽이라도 함께 먹으며 웃고 떠들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웃들 특히 이웃 어르신들께 귀찮아서 안 만들게 되는 음식을 자주 대접하곤 했습니다. 잡채와 백설기, 팥죽 등을 어르신들께 음식을 대접할 때면 그녀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이웃 몇 명도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특히 그녀가 끓여낸 팥죽은 살살 녹을 만큼 맛있었습니다. 내가 끓인 팥죽 새알심은 퍼져서 흐트러지는데 그녀의 새알심은 흰 새알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마침 내일이 동짓날이네요. 음력 열아흐레이니 중동지입니다. 동지가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애동지 때는 팥죽 대신 팥시루떡을 준비합니다. 오늘 저녁 팥죽을 쑬 예정입니다. 새알심이 내 맘에 들게 잘 쑤어지면 그녀에게도 한 그릇 전할 생각인데 마음처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명자 씨 젊은 날 얼굴이지? 미안 미안, 명자 씨가 더 고왔겠지?"

"아이고 언니는. 언니도 얘보다 훨씬 이뻤을 것 같은디."


둘이서 오랜만에 아이들처럼 웃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예전이라도 좋게 상상해 주는 말이 좋은가 봅니다. 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대의 과거 좋았을 날을 상상하며 주고받는 말에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집니다.

"쭈글거리면 버리지 말고 나한테 주면 돼. 씨앗 빼서 심어 보려고."

"알았어, 언니. 낼모레 동지 팥죽 쑤지 마세요. 내가 한 그릇 드릴게."


햇살이 스며 더 환해진 명자 열매처럼 명자 씨 마음에도 햇살이 스민 듯 투명해 보였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노릇'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