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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Dec 22. 2021

인절미 넣고 대충 쑤어낸 동지팥죽이 꿀맛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내일이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이다.


동지는 애동지, 중동지, 노동지로 구분한다. 절기상으로는 양력이지만 그 양력 동짓날이 음력으로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애동지 그러니까 음력 동짓달 초순에 동지가 들면 팥죽을 쑤는 대신 팥시루떡을 해 먹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어떤 설이 정확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올해 동지는 음력으로 11월 19일이니 중동지에 든다. 팥죽을 쑤어 먹으며 미리 한 살 더 먹기로 했다. 


예부터 동지와 함께 새해가 시작된다고 하여 작은설로 불릴 정도로 세시 풍속에서는 중요하게 여기는 절기이기도 하다. 몇몇 친구들이 나이만 먹지 말고 동지팥죽 먹고 건강하자고 톡을 보내왔다.





예전에 친정어머니는 동지 전날 저녁 팥죽을 넉넉하게 쑤어 저녁으로 한 그릇씩 내셨다. 그리고 붉은 팥죽 국물을 집 여기저기에 조금씩 발라두시곤 했다. 붉은색은 액을 물리치는 색으로 나쁜 기운이 집안에 들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와 이웃들은 팥죽을 한 그릇씩 이웃에 돌리며 나눠 드시곤 했다. 팥죽은 하룻밤 정도 식혔다 먹으면 더 맛이 있어서 다른 집에서 나눠준 팥죽이 많아도 질릴 리가 없었다.


이번 동지팥죽 재료는 안사돈께서 지난가을에 보내 주신 팥과 찹쌀을 이용했다. 팥은 어제저녁에 담갔다 씻어 삶아 첫물과 두 물은 버리고 다시 압력솥에 푹 삶았다. 팥에도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팥 고유의 성분이 있는데 그 성분이 사람에게는 소화불량이나 설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팥을 끓인 첫물과 두 번째 끓인 물은 버리고 다시 새 물을 잡아 푹 삶아 쓰면 된다. 찹쌀은 오전에 씻어 팥과 함께 물 넉넉히 잡고 담가 두었다. 문제는 새알심이다. 찹쌀가루 풀어 넣거나 찹쌀 모양이 살아 있는 팥죽도 물론 맛있다. 하지만 새알심 씹는 즐거움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고는 그냥 넘어가기가 서운하다. 그렇다고 찹쌀가루를 사다 새알심을 빚어본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풀어지거나 갈라져 온전한 모양으로 잘 익어준다는 보장도 없다. 동지 전 날이니 새알심만 파는 데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마침 동네 한 바퀴 도는 중에 이웃 아파트 단지 화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부지런히 달려갔다. 하지만 새알심만을 파는 곳은 물론 새알심을 빚어 넣은 팥죽도 없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찹쌀과 맵쌀을 섞어 넣은 팥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커다란 솥의 팥죽을 팔을 바꿔가며 열심히 젓는 모습만 잠시  지켜보았다. 


구하고자 하는 새알심이 없으니 건성으로 장터를 훑고 돌아 나오려는데 장터 맨 끄트머리에 인절미 파는 가게가 있었다. 아하, 인절미. 새알심 대신 인절미를 잘라 넣은 이웃 블로거님의  팥죽 사진이 떠올랐다. 인절미 포장만 잔뜩 쌓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점포 주인장께서 나를 보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반기셨다. 인절미 네 팩을 샀다. 내 뒤로 오신 어르신 두 분이 인절미를 두 팩씩 집어 들었다. 


"아주머니가 손님을 몰고 오시나 봅니다."

나쁠 리 없었던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인절미 올린 팥죽 맛이 어떨지 기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팥죽에 물을 많이 잡았는지 힘주어 젓지도 않는데 국자가 휘휘 돌아갔다. 인절미 한 팩을 열어 인절미를 자르고 콩고물과 함께 끓고 있는 팥죽에 털어 넣었다. 묽었던 팥죽이 인절미가 풀어지고 섞이면서 묵직하게 변했다. 소금 한 스푼 넣고 맛을 보니 원하던 맛이 아니다. 설탕을 한 국자 넣고 저어 맛을 보니 비로소 괜찮은 맛이 난다. 뚜껑을 열어둔 채 30분 정도 한 김 나가도록 기다렸다 그릇에 담았다. 식은 팥죽이 맛있지만 완전히 식기까지는 기다릴 수는 없고 오늘 임플란트 검진을 받은 남편을 생각해서 약간 식을 때까지만 기다린 것이다.


남편과 내 그릇에 세 국자씩 담고 자른 인절미 조각을 다섯 개씩 올렸다. 요즘 입맛을 잃은 듯 먹을거리에 별 관심이 없는 남편도 오늘 팥죽은 그런대로 맞는 모양이다. 인색하지 않은 칭찬을 한다.

"인절미 넣은 팥죽은 처음 먹어보는데 괜찮은데. 맛있어요."

"그러게. 인절미가 풀어져서 걸쭉한 게 좋아요. 설탕은 좀 많이 들어간 것 같지?"

"단팥죽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팥하고 인절미하고 궁합이 맞나 봐. 팥빙수에도 인절미 조각 올려 먹잖아요."

"그런 것 같네. 팥빙수에 인절미 안 들어가면 밍밍하지."

"앞으로는 잘 만들지도 못하는 새알심 만들려고 애쓸 필요 없겠어요. 인절미 최고."






재빨리 설거지를 끝내고 명자 씨에게 인터폰을 넣었다. 이 집 그릇 저 집 그릇에 팥죽 묻히지 않고 설거지 하나라도 줄일 생각이 앞섰다. 팥죽 줄 테니 2분 후에 그릇 들고 나오라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런 때 내 급한 성격이 튀어나온다. 이 시간에 어디 갔을 리는 없는데 싶어 마스크를 쓸 새도 없이 들고나갔다. 벨을 누르자 내 발걸음 소리를 아는 반려견 베리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왈왈, 빨리빨리.


"왜 인터폰을 안 받아?"

"받았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던데?"

"나도 아무 소리가 안 들려서 뛰어왔지. 팥죽 쑤었어?"

"아니, 언니한테 팥죽 쑤어 한 그릇 준댔는데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넘어가기로 했어요."

"잘 됐다. 얼른 그릇 줘 봐. 내가 팥죽 쑤었어."


건강이 안 좋은 그녀가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그릇 하나를 들고 왔다. 그런데 그 그릇이 음식점에서 냉면 낼 때 씀직한 커다란 대접이다. 

"안 돼. 작은 그릇 줘. 나 손 작은 거 알잖아."

"조금만 주면 되지. 흘릴까 봐 그래요."

"알았어. 얼마나 많이 쑤었는지 남은 팥죽 다 담아도 이 그릇에 안 차겠다."


그녀가 건네준 냉면 대접에 팥죽을 담으며 생각한다. 그랬다. 이 그릇은 그녀가 예전에 나와 이웃들에게 팥죽을 담아 권할 때 사용하던 그 대접이다. 대접 가득 팥죽을 담아내고도 모자라지 않느냐고 묻고 또 묻던 그녀였다. 


내가 먹은 팥죽의 두 배 정도를 담고 자른 인절미 다섯 개를 올린 다음 그녀에게로 향했다.

"새알심 만들어 넣으면 갈라지고 푹 퍼져서 모양이 안 나와. 그래서 새알심 대신 인절미 넣었어."






언제부턴가 이맘때면 특히 먹을 게 많다는 생각을 한다. 팥죽이야 세시풍속에 따라 먹는 음식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하는 나이까지 같이 먹으려니 배가 더 부르다. 하긴 시간이 언제 쉬었던 적이나 있었던가. 태양과 지구와 달의 공전과 자전 주기에 따른 일 년이나 한 달, 하루 등 인간이 정한 시간 단위와는 무관하게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이 '흐른다'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도 사실은 알 수 없다. 한 살 더 먹었으니 나잇값이나 하자며 동지팥죽 끓인 냄비를 정리하는데 그녀로부터 문자가 왔다.


- 팥죽 넘넘 맛있어요. 꿀맛이에요. 잘 먹을게요.

- 그래, 내년에는 아프지 말고 건강해.


난생처음 인절미 넣고 대충 쑤어낸 팥죽에 꿀맛이라는 찬사를 보내준 그녀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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