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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pr 30. 2022

심부름이 즐거운 남편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방금 현관문을 나섰던 남편이 바로 다시 들어오며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다. 저녁 설거지 중이던 나는 자주 그렇듯이 남편이 또 뭘 두고 나갔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왜요? 설거지 중인데. 폰 달라는 거라면 직접 갖고 가세요."

"아니, 폰이 아니고. 빨리 이 그릇 좀 비워 줘요."

빨리? 설거지 중이던 손을 헹구고 서둘러 남편에게 다가갔다. 남편이 하얀 사각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에는 녹색이 도는 손바닥 만한 부침개가 담겨 있었다.





"어머나, 이걸 누가 갖고 왔어요?"

서둘러 우리 접시에 음식을 비우고 음식을 보내온 접시를 씻어 마른 행주질을 하는 동안 남편이 채근 댔다.

"아, 위층에서. 빨리 주세요, 접시."


"아니 접시는 씻어 보내야죠. 위층 아저씨가 이 접시를 들고 오셨단 말씀?"

"그래요, 방금 전화가 와서 나갔더니 접시를 들고 현관 앞에 서 있지 뭐야. 접시 빨리 좀 줘요."

"아니, 물기는 닦아야지. 아저씨가 만드셨대?"

"아니, 부인이 청양고추 갈아 넣고 만드셨대나 봐."

"아, 그래서 푸른색이 나는구나. 여기 접시요. 퇴근하고 식사하기도 바쁘실 텐데 언제 이런 음식을 만드셨을까? 잘 먹겠다고 전해 주세요."


밖에는 음식을 들고 온 위층 이웃이 기다리고 있고 아내는 음식 받은 접시의 기름기를 주방 세제로 박박 문질러 닦고 마른 행주질을 한다. 밖에 사람을 세워둔 남편은 안절부절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접시를 빨리 달라고 재촉 또 재촉이다. 접시 씻고 물기 닦는 사이에 남편의 마음만 홀로 급하고 아내는 할 일과 할 말을 다 한다. 마음만 홀로 급한 남편 또한 아내의 질문에 빠뜨림 없이 답을 한다. 


아무리 급해도 순서가 있는 법이라는 사실을 남편은 모른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지금까지도 깨치지 못한 남편이다. 음식만 다른 접시에 옮겨 담고 음식 담아왔던 접시는 씻지 않아도 잘 먹겠다는 말만 전하면 되는 줄 안다.






접시를 돌려주러 나갔던 남편이 잠시 후 들어와 물었다.

"먹어 봤어?"

"아직. 청양고추 갈아 넣었다며?"

"그래요. 그 친구가 한 장 또 갖고 내려와서 그 친구 차에서 한 쪽 먹어봤는데 매운 거 좋아하는 내 입에도 매워. 입술이 다 얼얼하네."

"그 아저씨가 매운 걸 좋아하시나 보네."

"아니래. 그 친구도 매운 거 못 먹는다는데."

"그럼 왜 청양고추를 그것도 갈아 넣고 부침을 하지?"

"그야 난 모르지."

"그럼 그 부인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그 부인이 자란 곳에서는 청양고추를 갈아 넣고 부침을 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겠네."

"나도 하나 먹어봐야지. 아무리 매워도 보내온 성의가 있지. 맛은 봐야겠어요."


매운 음식에 유독 약한 나는 쳥양고추는 양념장 만들 때 외에는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얼할 정도로 맵다는 말에 겁은 잔뜩 먹은 터라 식초를 평소보다 세게 넣은 간장소스를 만들었다. 부침개를 작게 찢어 소스에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처음 베어 물었을 때는 몰랐다. 약간 풋내가 날 뿐 매운맛은 강하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금니 쪽으로 부침을 옮기는 순간 혀는 물론 홧홧한 입안의 매운 기운이 온몸을 향해 뻗어나갔다. 어린 날 친척 오빠들이 개구리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 치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사지를 쭉 뻗으며 생명을 놓던 개구리가 내 몸과 오버랩되었다. 재빨리 찬물 한 컵을 들이켰다. 


"옴마야, 진짜 맵다. 혀가 날아가다 못해 온몸이 쭉 뻗는 느낌이야. 그 부인이 매운 걸 엄청 즐기시나 보네. 나머진 당신 다 드세요."

"알았어요. 천천히 먹을게."

"넉 장이나 남았어요. 식빵에 참치 샐러드랑 치즈 넣고 얘도 하나 곁들여 먹어볼까?"

"그것도 괜찮겠다. 그걸 먹고 당신이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청양고추를 갈아 넣고 만든 이 매운 부침개가 어떤 음식의 맛은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내가 그 음식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매운 부침개를 놓고 남편에게 다 먹으랬다가 식빵에 넣어 먹쟀다가 죽 끓듯 변덕을 끓이는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터졌다.

"왜? 속이 불편해?"

"아니, 아직은 괜찮아요. 계속 괜찮았으면 좋겠어. 예전엔 이웃에 음식 나눠줄 일 있으면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 들고 다니며 나눠 드리곤 했잖아. 근데 위층도 우리 집도 뭔가 바뀌어도 완전 바뀌지 않았어요?"

"나눠 주러 다닐 아이들이 없으니까 그렇지."

"아이들도 없긴 하지만, 당신도 위층 아저씨도 머리에 하얗게 서리 내린 지가 언젠데 이웃에 음식 나눠주러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당신도 위층 아저씨도 서로 나눌 거 있으면 전화해서 살짝 현관 문 앞에 갖다 놓거나 손잡이에 걸어두곤 하잖아."


남편이 빙긋 웃었다. 

"그야 남자들끼리 먼저 마음을 터서 그런 거겠지."

"맞아. 당신이 아는 우리 동 이웃 몇 집은 늘 남자분들이 뭘 들고 다니며 나눠주곤 해. 전화를 걸어 내려오라고 하거나."

"그래, 엊그제 우리가 준 오가피 순이랑 달래로 밥 비벼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입꼬리가 귀에 걸렸어."

"다행이다. 뭘 이런 걸 다 주나 할까 싶었는데."

"그런 사람일 것 같으면 애초에 말도 안 섞지."

남편이 사람 보는 눈 있다고 잘난 척을 했다. 돈 버는 눈이야 애초에 남의 나라 일이니 나이 들어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라도 길러 올마나 다행이냐고 남편을 치켜올렸다 끌어내렸다 또 춤을 주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서 물처럼 흐르다 삶의 어느 시기에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는 나이 든 남자들도 있다. 어렇게 모여 사는 나이 든 남자들은 때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젊은 날에 비해 어느 정도는 자신감이 떨어진 경우가 많다. 그들끼리 엘리베이터든 주차장 한구석 끽연장에서든 눈인사를 주고받다가 통성명을 하고 살아가는 이런저런 모습을 이야기하며 마음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그들은 그들끼리 오랜 친구와는 또 다른 그룹을 형성한다. 남편들이 친하게 된 이후엔 아내들도 서로 눈인사를 나누게 된다. 점차 아내들도 좋은 것이 생기면 눈인사라도 나눈 자신의 남편과 친한 이웃과 나누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열기에 이른다. 


남편들은 아내의 이런 나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즐긴다. 그리고 그 적극적인 동참은 아내들로 하여금 남편들에게 약간의 여유 있는 일탈은 눈감아줄 수 있게 하는 좋은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몇 층 몇 층의 누구누구와 한잔하고 갈 테니 걱정 말라는 전화를 걸어오면 '안 돼'라고 딱 잘라 말할 아내는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엄마, 나 오늘 영식이네 집에서 놀다 올게요. 태호도 같이 가서 산수 공부도 좀 하구요."

어려서 남동생들이 어머니께 하던 말이 귀를 간지럽힌다. 남편들은 지금 순진했던 어린 날 어느 시기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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