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by YUJU

나는 타인에게 친절히 대하는 사람을 대단히 존경한다. 특히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관계에서의 친절은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에게 '잘 대해준다'는 것이 적잖은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호의라는 명분 하나로 꺼내어 쓰는 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 자체로 대단한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사회의 '을'에 해당하는 존재들에 대한 친절은, 비단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고결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간혹 이렇게 대가 없이 내민 호의가 상대방에 의해 오히려 무참히 짓밟힐 때가 있다. 얼마 전 내가 겪은 일이 그랬다. 아이 학원 라이딩을 하면서, 주차를 관리하시는 관리원 할아버지께 언제나 정성껏 최선을 다해 웃는 얼굴로 인사를 드리곤 했다. 그날도, 마치 학교 은사님을 대하는 자세로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차량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는데 사건이 벌어졌다. 엘리베이터 안 지정된 구역에 차가 정차해야만 초록불이 들어오고 운행이 시작될 수 있는데, 차가 지정된 자리에서 조금 앞쪽으로 벗어나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운행을 중지한다는 경고의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그때까지도 차가 제자리에 정차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왜 빨간불이 들어오는지 몰라 그저 당황해하고 있었고, 그때 관리원이 씩씩대며 차 뒤로 나타났다.


관리원: (버럭 화를 내며) 지금 빨간 불 떴잖아요!
나: 아..네.. 어떻게 해야 되나요?
관리원: (짜증을 잔뜩 내며) 빨간 불 안 보여요?
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관리원: 빨간 불이 왜 떴겠어요?
나: (아니 그러니까 빨간불이 안 뜨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관리원: 차를 뒤로 빼야지!


애초에 "차를 뒤로 빼세요"라는 한 마디면 될 것을. 관리원 할아버지는 상황 개선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몇 마디를 반복해서 나누는 그 쓸모없는 시간이 아깝지도 않은지, 마치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듯 나에게 역정을 쏟아내었다. 졸지에 그분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한 실수가 저분이 이렇게 크게 화를 낼 정도로 큰 잘못인가. 나는 그동안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저분을 만날 때마다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던 기억밖엔 없는데, 저분은 나의 어떤 잘못 때문에 이렇게까지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잘 대해드리려 했던 모든 노력들은 이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도 아니었던 것일까. 만약 이 관리원이 "내가 언제 너 같은 것 한테 그런 호의를 바랬냐?"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저 그동안 헛되이 시간 낭비, 정신력 낭비, 에너지 낭비를 한것만 같은, 그러면서도 나의 작은 친절이 저분의 고된 하루에 찰나의 행복이 되길 순진하게 바랬던 나 자신이 바보 같고 화가 날 뿐이었다.




우리 주변에 호의를 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약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장애인 혹은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는 저임금 노동자와 같은 이들이 그렇다. 그러나 약한 사람을 보기만 해도 우리의 몸 안에서 '호의 호르몬'이라는 것이 불수의적으로 분출되는 건 결코 아니다. 교육에 의한 것이든, 양심에 의한 것이든, 호의에는 그것을 실천하려는 당사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호의가 거듭 당연시되면, 이 모든 것이 의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진실은 흐려지고 당위만 남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호의를 권리로 여기는, 일부 비뚤어지고 몰상식한 약자들의 작태에 분노하게 된다.


지금의 이스라엘의 행동에 전 세계 사람들이 넌더리를 내는 이유도 어쩌면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한 명의 악질 사이코패스가 한 민족을 대상으로 자행한 대학살로 인해, 이스라엘은 그동안 세계의 동정과 호의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80여 년이 지난 후, 학살의 방법이 가스냐 폭탄이냐의 차이일 뿐 이번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주민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하며 못난 역사를 반복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나약한 이들의 양아치 짓에도 긁혀 그들을 완전히 불구가 될 정도로 때려눕혀버리는('절멸'이라는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단어가 다시금 떠올려질 만큼) 깡패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점에도 자신들이 당연하게 받아왔던 세계의 호의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변치 않을 것 같은 호의를 본인들의 정의를 증명해주는 권리로 삼아 이런 무참한 폭력을 보란듯이 행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이전의 불행한 역사를 생각해서,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던 이들마저도 그들의 폭력적인 행태를 변호하지 못해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작금의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이다.




그 사건이 있고 다음주가 되어, 학원을 다시 찾았다. 화가 많이 나있던 나는 이번엔 호의를 보여주지 말아야겠다 다짐도 했지만, 그래도 결국 공손하게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아뿔싸. 그날 나에게 화를 낸 할아버지는 내가 평소에 인사를 드렸던 할아버지와 다른 분이셨다. 하필 내가 주차 문제가 있었던 날 근무하셨던 할아버지는 그동안 일하던 분의 대타와 같은 분이셨던 모양인데, 안면 인식 장애가 있는 내가 두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던 거였다. 원래 일하시던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로 내 인사를 받아주시고, 감사하게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직접 눌러주셨다. 나는 깨닫게 되었다. 호의가 당연시되는 상황에 종종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대가 없는 호의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악은 언제나 선보다 힘이 강하다. 그럼에도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사회가 악으로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이유는, 그 기저에 선한 개개인의 작은 호의들이 반복적으로 생성되며 선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호의의 쓸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받는 호의에 당연이란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그래서 누군가의 호의를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가 받은 호의에 대한 답례로 그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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