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책장에는 세계명작동화 및 청소년 동화 시리즈가 있었다. 전집으로 산 것은 아니고 책 살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같은 출판사와 시리즈 낱권을 모아 왔던 것이다. 유난히 더 손이 많이 가는 책들이 있었고 그중에 하나가 <메리 포핀스>였다. 당시 한참 좋아하던 판타지 장르에 펜으로 그린 삽화도 취향 적중. 아이들이 뛰노는 큰 집을 상상하는 것이 좋았고 메리 포핀스의 큰 가방을 상상하는 것도 좋았다.
메리 포핀스의 에피소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쌍둥이 형제가 첫 돌을 맞이하기 전까지 나누었던 대화다. 아기는 새, 바람, 나무, 햇살 등 자연의 모든 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이 능력은 첫 돌을 지나며 사라져 버리고 아기들은 평범한 사람이 된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자연물들에게 쌍둥이 형제는 '나는 절대 너희를 잊지 않을 거야. 너희 말을 잊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결국 첫 돌을 맞이하는 날 아침 여느 아기들처럼 모든 것을 잊고 만다.
그 후로 동화나 판타지와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으므로 별이를 낳은 당시에 이 에피소드는 내 기억밖에 있었다. 당시 나를 지배했던 픽션은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였고 혹여나 못된 누군가로 인해 나와 별이가 헤어지게 될까 봐 공포에 질렸던 시기였다.
별이는 참 순한 아이였는데, 사실 이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고 아기를 처음 키워 보는 터라 이 아이가 순한 아이인지 까다로운 아이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였다. 나의 작은 실수가 이 아이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었으니까. 산후 호르몬과 싸우는 와중에도 이 공포감은 늘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모유, 아기의 대소변, 아기와 엄마의 눈물, 한여름 수유를 하며 흘리던 땀, 아기가 하루 종일 흘리던 침... 마치 이 세상 모든 분비물과의 싸움 같았다. 아이를 앉혀놓고 수십 번씩 울음을 터뜨리던 시간이 쌓여 1년이 되었다.
돌이 되기 몇 주 전, 별이는 이유모를 울음을 오래오래 울었다. 기저귀도 아니었고 맘마도 아니었고, 초보 엄마인 내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이유였다. 안아주는 것으로도 안 됐고 눕히는 것으로도 안 됐다. 한밤중에 온 동네를 울리는듯한 울음이 오래 이어지자 슬슬 불안감이 올라왔다. 방음이 잘 안 되어 매일 새벽 윗집 화장실 쓰는 소리에 함께 기상해야 했던 집이었다. 이러다가 누군가 인터폰이라도 하면 어쩌지. 하필 아이 아빠도 야간 당직이라고 집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포자기할 무렵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돌이 지나고 모든 것을 잊게 되는 아기들. 아기들은 잊지 않겠노라 호언장담하다가도 결국은 모든 걸 잊게 되던데. 혹시 별이는 그것이 서러운 것일까?
별이는 매일 밤 엄마가 지쳐 잠들면, 달과 별과 바람과 뒷산의 수많은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에 오기 전 머물렀던 곳 이야기, 그곳에서 만난 존재들의 이야기, 그들과 이별하고 나를 찾아오기로 결심한 이야기. 그들의 언어를 잊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전의 간극 동안 별이는 대화할 상대를 잃고 외로운 시간을 견디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울한 엄마를 온전히 견디어야 하는 그런 시간을 말이다.
별이의 그치지 않는 울음을 내 방식대로 이해한 밤이었다. 나는 별이를 안고 많이 아쉽겠구나 그립겠구나 속삭이며 토닥여주었다. 별이는 잠시 후 울음을 그쳤는데 엄마가 마음을 읽어주는 것에 안도해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울다가 지쳐버린 것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어쩌면 내가 아닌 달과 별과 바람과 나무들이 아름다운 언어로 별이를 위로하고 안아주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별이는 사람의 언어를 아주 잘 구사한다.
- 엄마, 이걸 먹어야 쑥쑥 자라지~
- 엄마,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어~
- 엄마, 나 좀 도와줄래? 이것 좀 치워줄래?
- 엄마, 나 몇 키로야? (키를 재 달라고 벽에 붙어서며 하는 말이다)
- 엄마, 달팽이가 똥을 쌌어!
폭발적인 언어발달을 보고 있으면, 아기가 하고 싶은 말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사람의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말을 삼켰을까? 별이가 내게 찾아오기 전 있었던 일들을 이제는 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 이 아이와 나누게 될 그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을 테니까. 그 이야기들이 너의 삶을 채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