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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09. 2021

하원 후의 시간들

아이에게 배우는 세상 - 성장의 기록

© karim_manjra, 출처 Unsplash



4시에 아이를 하원 시키고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까지 짧으면 5시간, 길면 8시간을 단둘이 보내야 한다. 숫자로 적으니 더 숨이 턱 막히는 시간들이다. 아이에게 절대 폭력적으로 대하거나 감정을 내세우는 언행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강박이 있기에 이 시간이 솔직히 아주 무겁게 느껴진다.



아이는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계속 떼를 썼다. 손을 씻지 않겠다고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놀겠다고 여러 가지 이유로 소리를 지른다. 급히 퇴근해서 아이를 하원 시킴과 동시에 나만의 시간은 모조리 사라진다. 아이를 먹이고 놀아주는 일만이 남으며, 사실 수발이나 다름없는 시간이 5~8시간 동안 계속되는 것이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싶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거나 아니면 깊은 적막 속에 있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나의 취향들은 아이 앞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마트나 놀이터를 들르지 않고 바로 집에 왔다고 유모차에 앉아 계속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초콜릿, 키즈 유튜브 영상 등 악영향을 준다고 알려진 것들을 가져와야 한다.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한 죄책감이 달려 나온다. 아이의 울음을 견디든가 아이에게 안 좋은 것을 모른 척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셈인데, 어떤 걸 선택하든 고통이라는 결론이다.



오늘은 선물 받은 수제 그래놀라를 먹겠다고 떼쓰기에 그릇에 부어 주었더니 절반 이상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장난을 친다. 지인의 선한 마음이 아이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이건 더 이상 선물도 음식도 아니었다. 바닥에 흩뿌릴 수 있게 자꾸 더, 더,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내가 뭐를 더 할 수 있을까.



그 전에는 변기에 쉬를 하지 않겠다고 아이가 무게를 실어 내게 매달리고 말았으므로 온몸의 근육이 긴장된 상태였다. 지친 몸으로 몸부림치는 아기의 무게를 견디어야 할 때와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제까지는 어찌 잘 참아왔지만, 최근 직장에서 일이 몰리며 눈코 뜰 새 없는 일주일을 보내고 있는 터라 그게 잘 안 됐다.



씻은 손으로 또 화장실 바닥을 슥슥 만지며 물장난을 치려고 한다. 어깨 근육에 매달리며 그네 타듯 몸부림치던 5분 전 상황을 겨우 견디며 씻겨놓았는데 또 손을 지저분하게 만들려고 하는 모습을 보자 화가 폭발했다. 그래서 복성을 써서 '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대중 말하기를 하는 직업인에게 복성은 필수요소다) 아이가 흠칫 놀라서 바닥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길로 화장실에서 나와 식탁 앞에 앉는다.



밥을 먹이려고 고기를 굽고 잘게 잘라서 따뜻한 밥과 함께 주니 이건 안 먹고 딸기우유를 먹겠다고 한다. 식탁 앞에 앉혀놓으려고 뽀로로 영상을 틀어놓은 상태였으므로 나의 허용한도는 이미 초과였다. 다시 무서운 표정으로 '딸기우유는 없어. 밥을 먹어.'라고 딱딱하게 말했다. 아이는 내 눈치와 뽀로로를 번갈아 보더니 말한다.



- 그럼~ 그럼~ 밥 먹으면 딸기우유 먹어?



아이는 나에게 주눅이 들어있었고 그래서 먹기 싫은 밥을 먹으려고 하고 있다. 죄책감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미안해지는 순간.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낸 것도, 뽀로로를 보여준 것도, 먹고 싶다는 딸기우유를 일부러 못 먹게 한 것도, 이제까지 내가 했던 모든 행동이.



밥을 먹으면 딸기우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한 숟갈 떠먹이니 곧잘 받아먹는다. 더 이상 보채지도 떼쓰지도 않고 의젓하게 앉아있다.



-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우리 손 잡을까?



아이는 대답 없이 손을 내어 준다. 한 손으로 아이 손을 맞잡고 다른 손으로 숟가락에 고기를 얹어 주었다. 아이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중간중간 킥킥 웃어가며 뽀로로를 본다. 아이는 그새 다 잊었을까. 잊는 것은 아이의 특권일까.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앙금 같은 것이라곤 전혀 없는 세상을 살아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단호함과 죄책감 사이.

수월함과 죄책감 사이.

너무 어렵다.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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