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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l 24. 2021

치울 게 없어서 기쁘다

학교와 학교 - 책상 위 낙서

 추억의 영화 ‘여고괴담’에서는 학교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원혼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무려 9년간이나 이름을 바꾸어가며 재학하는 설정이 나온다. 카메라 앞으로 쿵쿵 다가오는 원혼의 점프 컷이 오래도록 회자되던 영화를 나도 보다. 어느 타이밍에 무엇이 나오는지 모든 정보를 얻고 음에도 꽤 무서웠던 기억이다. 흠, 그런데 말이야…. 9년 동안 같은 학생이 학교에 다니는데 정말 아무도 몰랐던 거야? 친구들도? 선후배들도? 선생님도? 저 학교 담임선생님은 학기 초 개인 상담을 진행 안 했던 건가. 한 학년 수업연구해 놓으면 다음 해에도 으레 그 학년을 맡게 되는데, 얼굴까지 똑같은 학생을 매년 만나면서도 아무도 몰랐다는 건가. 생활기록부 써 주려면 학생 관찰을 적어도 매 학기 몇 번씩은 해야 할 텐데, 설마 같은 말 가져다 복사해 붙인 거 아냐? 이거 교육청 점검 때 백 프로 걸렸을 거야. 뭐, 백번 양보해서 생활기록부는 그렇다 쳐도, 대입 시즌에는 보호자 면담 때문에 적어도 전화통화 한 번은 하지 않았을까.          



 ... 꼭 이런 상황에 발휘되는 직업정신이었다. 이 모든 영화적 설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학급당 인원이 60명 안팎이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 세대로 매년 과밀학급의 일원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책상은 교탁 위치에서부터 시작하여 맨 뒤쪽 벽까지 가득 들어차 있었고 우리는 항상 밀착되어 있었다. 시험 기간에는 책상 배치를 적절히 띄워 놓아야 했는데, 맨 끝번 학생이 뒷문을 막는 위치까지 밀려가 오가는 친구들을 위해 쉬는 시간마다 자리를 비켜주어야만 했다. 이런 환경에서 학급 구성원 모두가 가깝게 지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은 가까운 몇몇에만 정을 주며 1년을 보내곤 했다. 한번 맺어진 친구 무리는 1년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중간에 크고 작은 다툼으로 소원해지면 그때부터는 학교생활이 무척 고달파졌다.          






 담임선생님의 주도로 진행되는 자리 바꾸기 이벤트는 그래서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자리를 바꾸어 이 친구 저 친구와 짝꿍이 되는 것이 매년 겪었던 교실 규칙이었다. 그해에 처음 만난 짝꿍은 단순히 출석 번호순으로, 나와 같은 성과 가운데 이름 글자를 갖고 있기에 옆자리에 앉게 된 친구 선진이었다. 새 학년 새 학기의 어색함은 기본이었거니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없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달랐을까, 우리는 아침 인사도 나누지 않는 서먹하기 그지없는 짝꿍 사이였다.           


 ‘대체 왜 짝을 안 바꿔주는 거지….’          



 3월이 다 지나기 전까지 선생님은 자리를 바꾸어 주지 않았다. 벌칙 같았고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3월은 선생님들도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혀야 하는 달이고 이것저것 수합해야 하는 가정통신문도 많은 달이라, 번호순대로 자리에 앉혀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말이다.       


   

 한참이 지나고 가을 축제 시즌이 되어서야 나는 선진이의 매력을 알았다. 만화반 동아리의 일원으로 매일 연습장에 인체 묘사를 하던 선진이는 코스프레 페스티벌에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원색 가발과 짙은 화장도 자기 것인 양 잘 어울렸다. 장난기나 웃음기를 싹 뺀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기에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마치 진짜 그 캐릭터가 된 양 도도하고 우아한 몸짓과 손짓으로 팬서비스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서먹한 사이였지만 나는 큰 용기를 냈다.     



 “저기…. 사진 좀 같이 찍어주라.”     



    




 겨울이 될 무렵 만난 짝꿍 지현이는 소음이 질색이라며 귀마개를 하고 공부하던 친구다. 이 친구 역시 당시까지는 잡담 한 번 건네본 적 없는, 60명의 급우 중 하나일 뿐이었다. 늘 공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아이였으므로 섣불리 말을 걸기 힘든 점도 있었다. 공부하는데 허리가 아프다며 학교 의자 대신 개인적으로 준비해 온 듀오백에 앉아 수업 듣던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말투가 느리고 낮다는 것도 한몫했다. 지현이는 무슨 말을 하든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특기가 있었다. 한껏 고조된 까르르 분위기도 한순간에 진화시켰다. 요새도 말썽꾸러기와 수다쟁이가 많은 반에서 수업할 때마다 지현이의 그 능력이 떠올라 부러워지곤 한다. 옆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무뚝뚝해 보이던 지현이도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 그 자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지나는 사람들 사이의 마법이랄까. 나는 지현이가 점점 좋아졌다. 슬슬 잡담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서로 빌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 자습시간, 문제집을 풀던 지현이가 느리고 낮은 말투로 웅얼거리며 내게 말을 건넸다. 자습시간이었으므로 지현이는 최대한 음량을 낮추어 말을 건넨 듯했다. 들리지 않았다.     


 “응, 뭐라고?”     


 내가 되물었다. 지현이가 다시 웅얼거린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 안 들려. 뭐라고 한 거야?”     


 거듭 묻자, 지현이는 귀마개를 빼더니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내 목소리 크냐고.”          






 이제 학급당 인원수는 그때의 반 토막 이하가 되었다. 어떤 해에는 한 반에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아이들과 만나기도 했다. 지역이나 학교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히 한눈에 학급 구성원들이 모두 들어오는 학급 사이즈가 수업하기도 활동하기도 좋다. 3월 둘째 주가 가기 전에 담임 반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수 있고, 4월이 오기 전에 수업하는 반 아이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울 수 있다. 종종 이름 대신 ‘야’나 ‘쟤’로 불리곤 했던 불쾌한 기억의 피해자인 내가 다른 가해를 하고 싶지 않아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3월 한 달간 이름과 얼굴, 번호를 익히게 되면 드디어 학생들이 기다려 마지않던 짝꿍 정하기를 시행한다. 랜덤인 것처럼 보이지만 선생님의 의도가 미리 반영된 자리 바꾸기 방법도 있긴 하나 그것은 영업 비밀이니 침묵하기로 하고, 나는 주로 자리 숫자판을 이용한다. 자리 배치에 맞게 숫자를 아무렇게나 뒤섞어 쓴 판을 만든 다음에, 아이들이 제비를 뽑아 그 숫자가 나온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다. 미리 숫자판 구성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원치 않는 숫자를 뽑은 후 제비를 바꿔치기하는 부작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뽑은 제비의 숫자 옆에는 ‘절대 붙어 앉아서는 안 되는 친구들’을 이유와 함께 적어서 내라고 한다. 2표 이상 받은 친구들은 우연히 짝꿍으로 뽑히더라도 갈라서 앉힌다.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므로 누구도 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교사와 학생들의 생각이 일치했다.          



자리에 남겨두고 간 낙서



 2주나 한 달 간격으로 짝꿍을 바꾸고 나면 친구들은 책상에서 짐을 빼 자리를 옮긴다. 간혹 휴짓조각을 서랍 속에 넣고 가는 친구들이 있으므로 사전에 충분히 주의를 시켜야 한다. 정이 많은 아이는 이제껏 사용한 자리의 새로운 주인이 될 친구에게 메모를 남겨놓기도 한다. 아이들은 새 자리와 짝꿍에 금세 적응한다. 학급 내의 모든 친구와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서먹할 일도 거의 없다. 같은 반에 있으면서 일 년 동안 인사 한번 나눠보지 않고 진급하는 일은 이제는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구닥다리 학교 전설 같은 것이 되었달까. 여고괴담의 원혼이 2020년대에 나타난다면, 교실 안에 오밀조밀 앉아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고 농담을 나누며, 아이돌과 게임 이야기로 재잘대다가, 겹겹이 묵은 한이 눈 녹듯 사라져 편히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흠…. 그냥 솔직한 이야기인데 교탁 맨 앞자리에 수업 리액션이 좋은 친구가 앉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적 댄스가 나온다. 반면 차가운 성향의 친구가 앉으면 괜히 얼어붙어 눈을 못 맞추게 될 때가 많고. 너희들의 활발한 끄덕임과 긍정적인 답변이 선생님에게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의미인지 아느냐! 그래서 사실 선생님도 짝꿍 바꿀 때마다 마음속에 잔잔한 떨림이 느껴지곤 한다. 조금 부끄럽지만 말이야.



※글에 쓰인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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