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요새 거리에서 흰나비를 자주 봐요. 흰나비를 볼 때마다, “할머니, 나 지금 집에 가. 얼른 따라오세요.” 아니면 “할머니, 요새 나 너무 지치는데 이것도 다 지나가겠지?” 하고 말을 건네요. 그럼 흰나비는 내가 몇 발자국을 걷는 동안 따라오기도 하고, 아니면 포르르 날아가 버리기도 해요. 나를 따라서 별이도 흰나비를 볼 때마다 왕할머니가 오셨다고 알려 줘요. 삼우제 날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께 갔을 때는, 성함을 새기기도 전인 비석 앞에서 동요에 맞추어 율동하고, 왕할머니가 나무가 되었다고 거듭 말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렸어요.
할머니에 대한 첫 기억은 무엇인지도 모르게 아득해요.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있는 사람이었고 늘 바쁜 엄마를 대신하는 분이었어요. 엄마 자리에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늘 당신이 엄마 대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할머니가 있던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천천히 알게 됐어요. 할머니는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별이를 임신한 나를 위해 달걀을 부치고 김과 김치를 꺼내 밥을 차려주셨어요. 그 식사를 평생 잊을 수 있을까요. 출산 직후 입원실에서 만났을 때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답니다. 엄마나 남편 앞에서 나오지 않던 눈물이 할머니 앞에서 쏟아지는 게 이상했어요. 내가 날것의 감정을 오롯이 표현해도 괜찮을 사람은 세상에 할머니뿐이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너무 외롭게 가셨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할머니와의 이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해 온 것이라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는 눈물조차 나지 않더라고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고모와 작은 엄마를 봤어요. 저들에게도 할머니가 유일한 사람이었을까, 생각했어요. 그 앞에서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존재였을까. 그 포화한 슬픔에 앞자리를 내어주었고, 흰 천에 덮여 옮겨지는 할머니의 손을 잡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 했어요. 할머니는 이후에 수의에 꽁꽁 싸매어졌고, 이후에는 관 속으로, 그리고 벽제 승화원의 화로 속으로. 너무나 사랑했던 그 손과 품이 사라져 가는 모든 순간을 보면서도,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밤에 계속 곁을 지켜드릴걸. 할머니 손 한 번 마지막으로 잡아볼걸. 기억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할머니는 내 곁을 지켜주셨는데 그 하루에 함께 있지 못했던 것이 너무 후회스러워요. 친구들과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할머니가 꿈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할머니한텐 힘든 일도 아닐 텐데 자주 와 주시지….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손, 그리고 할머니 냄새가 나는 품이 그리워요. 꿈에서는 감각까지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꿈에서 할머니를 꼭 만나고 싶어요.
별이는 잘 크고 있어요. 밥 안 먹고 말 안 듣고 미운 네 살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건강하게 잘 자라요. 내 생을 깎아 빚어가는 조각품 같아요. 모든 살이 깎여나가 그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별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게 억울하진 않아요. 적어도 별이에 있어서 만큼은 흘러가는 삶의 방향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종종 할머니 사진을 보다가 울 때가 있는데, 다가와서 엄마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할 정도로 별이는 많이 컸어요.
- 엄마, 왕할머니 보고 싶어?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이렇게나 아름다운 말로 나를 위로하는 아이예요.
별이를 키우는 모든 순간에 할머니를 생각해요. 할머니도 외로웠겠다. 정말 힘들었겠다. 자식 여섯을 키우고, 또 손주들을 키우고, 그 삶이 너무 고단 했겠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생의 모든 일을 겪으며 이른 종착점이 ‘영원히 홀로 됨’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꽤 의연해지기도 하고요.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됐어요. 복작복작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받은 많은 상처와 갈등의 진정한 의미를.
눈을 감은 할머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던 그 말이 바로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남을 말이라는 걸 압니다. 덧붙인 모든 말을 걷어내고 남은 마지막 말이요. 내가 평생에 걸쳐 별이에게 해 줄 말이기도 해요. 할머니, 고맙고 사랑해. 꼭 다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