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Nov 01. 2021

K-디스토피아의 현재와 미래

[독서기록] 손원평, 『타인의 집』

  


  글을 읽고 나이가 궁금했던 작가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최은영이었고, 이번에 손원평이 추가됐다. 청소년의 필독서가 되다시피 한 <<아몬드>>를 출간 연도에 읽었을 때에는 그 작가의 나이까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역순으로 <<서른의 반격>>을 읽고 나서도 그랬고, <<프리즘>>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번에는 조금 실망인데.’라고 생각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이번 책은 달랐다. 동시대를 통과하는 작가 같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같은 경험과 생각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고. 첫 책을 신생아를 키우며 구상했다는 작가의 말이 떠오르면서 그러면 그 아이가 지금은 몇 살 정도 되었겠거니 생각하다가, 그럼 그럴 수 있지 당연히 그럴 수 있지, 하는 생각과 연결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괴물들>이다. 아들 쌍둥이를 키우며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일하는 ‘여자’가 아빠를 살해하겠다는 말이 쓰인 필담 노트를 발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만 2세 미만 영아반 담임을 맡고 있는 여자는 아이들이 남편을 죽일까 봐 불안에 떨며 하루를 보내는데 어린것들을 돌보는 고충과 남의 아이를 수발하며 느끼는 적나라한 감정들이 드러난다. 아이 엄마에게 자아라는 개념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형식으로 써 내려 간 작품은 셀 수 없이 많겠으나, 엄마라는 단어에 ‘인생을 좀 먹은 지긋지긋한 단어(63쪽)’라는 수식을 가져다 붙여버린 이토록 직설적인 이야기는 처음이다. 내 삶을 완성된 어떤 것으로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존재가 도리어 그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도 이전엔 말해주지 않아 합리적인 판단으로 접근할 수 없었던 선택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표제작인 <타인의 집> 또한 그랬다. 치솟는 집값에 갈 곳 잃은 젊은이들은 세입자의 세입자가 되거나 거실과 베란다를 머물 곳으로 쓰며 그래도 미래는 조금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앞날을 계획하고 구성해 간다.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요 몇 년 사이 일어난 비정상적인 부동산 신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젊은 이들의 희망찬 미래가 한순간에 삭제되어 버린 몇 년이었다. 그동안 내가 꿈꾸던 미래 또한 상당 부분 삭제되었기에 나는 이야기 속 젊은이들의 일부일 수 있었다. 이야기는 아프고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질 수 있던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시대 흐름에 따라 늙어 간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아리아드네 정원>이다. 비혼을 선택한 후 가족 없이 노년을 맞은 '민아'는 그들을 수용하는 유닛에 입소하여 유닛 A에서 D까지 착실하게 추락해 간다. 사실 '지윤'이라는 인물에서 묘사되듯이 결혼을 선택했어도 그 미래가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는다. 인구의 절대다수는 노인이 차지하고 있고 이들에게 투입되는 세금이 막대하다. 사회는 더 이상의 인구를 생산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 지 오래였다. 단일민족의 신화는 깨어진지도 오래,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빗장을 열 수밖에 없었으며 젊은이들은 전복을 꿈꾸며 분노를 쌓아다. 조찰한 생활을 이어가던 민아는 잠시나마 젊은 이들과 함께 하는 유사가족을 꿈꿨으나, - 말 그대로 – 피가 섞이지 않은 그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더 이상 유용한 가치가 없는 그 세대는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스러져 간다.



  사회가 제시하는 정상성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는 <타인의 집>에서 벽을 만나고, 결혼과 출산을 통해 겨우 그 정상성을 확보한 여성은 <괴물들>에게 먹어치워 지고,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자 했던 인물은 <아리아드네 정원>에서 늙어 간다. 한국인만이 쓸 수 있는 k-디스토피아다. 같은 시대를 통과해 나가며 이처럼 공감되는 섬뜩한 이야기들을 쓸 수 있으려면, 나도 작가도 같은 것을 겪고 느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라야 했다. 추락이나 몰락이나 파탄이라는 단어가 가까워 보이는 이 세상에 다행히 사회초년생의 나이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간신히 얻은 상태에서 일하는 엄마로 아이의 존재가 사랑과 괴물 어디에 더 가까운지 자주 고민하는 현재를 살며, 그럼 이 아이가 자라면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되는 걸까 불안에 떠는 독자 -나- 를 관통해 갔다.



  그 모든 꼭지를 떨며 읽어가다가 최근에 내가 내린 결론과 맞닿아 있는 장을 만났으니 <zip>이다. 무책임한 남편에서 황혼육아까지 그 시대 한국 여성의 모든 코스를 고통스럽게 밟아 온 '영화'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다. 삶의 어떤 부분들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덤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잃은 것 말고도 얻은 것이 크다는 걸 인정하는 마음이다. 희망이나 체념으로 치환될 수 없는 마음. 수용이나 깨달음으로 치환될 수 없는 그런 마음이다.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영화는 현재를 후회하거나 되짚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일을 되돌려 일어나지 않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가능한 쪽을 택하고 편들어야 했다. (99쪽)

작가의 이전글 프로를 만나는 즐거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