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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n 04. 2022

책과 한글과 영어 교육의 초입에서

별님일기



© sinzianasusa, 출처 Unsplash



별이가 드디어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감개무량하다. 대부분의 발달 과정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게 차분히 따라와 주는 별이에게 매 순간 감사할 따름이다. 뭐든 억지로 되는 일은 없었다.


별이는 자주 보이는 글자를 유심히 관찰하고 사는 동 이름과 상가에 있는 상호, 받침 없는 글자를 하나씩 읽어 간다. 자주 보는 것을 이미지로 기억해 재생해 내는데, 처음에는 정말 소리를 지르며 놀랐다. 이거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데 꼭 별이를 추궁하는 것처럼 보였다. 별이는 글자를 잘 읽어놓고 엄마 때문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


별이의 한글 놀이를 차례로 복기해 본다.


1. 자모 놀이를 하다 : 세 돌 무렵


자모 자석을 들여와 붙여가며 놀았다. ㅏ를 돌려 ㅗ로 만들거나 ㅜ로 만드는 식이었다. ㅁ자를 콕 쳐보라고 하고 화가 나서 뿔이 났다며 ㅂ을 내밀었다. ㅇ에는 모자를 씌워주자며 ㅎ을 만들었다. 별이는 간단한 글자, 예를 들어 나비나 가지 같은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모음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엄마가 읽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자모를 합친 단어는 채 하루도 못 지나 잊어버리고 읽지 못했다.


문자 인식은 통 글자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자음과 모음을 먼저 배우는 것은 그다지 좋은 코스는 아니다. 그래서 자석을 가지고 하는 놀이는 말 그대로 놀이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별이는 한글에 관심이 없었다.



2. 이름을 알다 : 어린이집 졸업 직전


어린이집에서 아이 이름을 읽고 쓰는 연습을 시켜 주셨다. 유치원 서랍과 신발장에 붙어 있는 자기 이름을 아는 것부터 단체 생활의 시작이라고 선생님을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엄마였던 내게 유치원이 어린이집과 어떻게 다른 환경인지 알게 해 준 한마디였다.


별이는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에 색연필로 선을 그어가며 읽기를 익혔다.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이름 자는 제대로 읽게 됐다. 이때쯤 글씨 끼적이기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나마 생겼는데 성씨에 ㅎ과 이름의 ㅇ을 헛갈려 요상한 글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음운마다 배치된 소릿값이 있으니 읽어내기 어렵지 않았고, 그걸 발음해 주면 재미있다고 깔깔 웃었다.



3. 글자와 친해지다 : 유치원 입학 후


처음에는 앉혀놓고 가르쳐보려 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일기 쓰기였고 효과는 미미했다. 별이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불려주면 엄마가 단어나 문장으로 만들어 쓰는 방식이었다. 별이는 일기장에 쓴 글씨를 굳이 읽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도 덧그렸다. 오늘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고 이모티콘으로 그려주었다. 점심 메뉴에 따라 고기도 그리고 김치도 그렸다. 별이는 글씨보다 그림을 좋아했다. 아직 때가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도 꾸준히 올바른 글씨를 알려주려 획순을 맞추어 가며 썼다. 한 달 정도가 지나니 별이는 날짜를 자기가 써 보겠다고 나섰다. 소근육 발달이 느린 편이라 숫자에는 힘이 없었고 이리저리 뻗쳐 있지만, 뭘 쓰고 싶었는지는 보였다. 별이는 역시나 한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글씨보다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 자체를 좋아했다.



4. 궁금해하기 시작하다 : 유치원에서의 도움


유치원에서 열혈 배움 모드가 되는 별이는 선생님이 알려 주는 모든 것을 고대로 복사해서 집으로 온다. 누리교육과정은 아이들에게서 시작되는 배움을 기초로 하는데 별이 선생님은 이 방면의 전문가이신 듯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관심을 배움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달에 한 번씩은 토의를 활용하시는 것 같다. 어린이들이 제시하는 의견을 화이트보드에 적어 공유하는 사후 보고서(사전 교육 계획안은 간소화하고, 배움이 일어난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월말 보고서를 꼼꼼하게 써서 보내주신다)를 받아보았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별이가 아마 이 글씨들을 무척이나 궁금했을 거라는 감이 왔다. 친구들과 이것저것을 해 보는 과정에서부터 서서히 글자에 관한 관심이 올라왔을 거다. 그 무렵부터 별이는 사방에 쓰인 한글들을 일분일초도 안 쉬고 묻기 시작한다. 정말 귀찮을 정도로 묻기 시작했다.


‘화단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읽어달라고 해서 ‘꽃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고 말해 주니, “엄마, ‘요’자 없잖아. 다시 읽어 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일단 쓰인 대로 읽어주고 이어지는 질문에 부가 설명을 했다.



5. 관심이 증폭됐다 : 독서로 돌아온 별이


한동안 영상에 의존하던 터였다. 자기 전 20분간을 타이머 맞추어 놓고 영상 보는 식으로 하루씩 버텨왔었는데 그쪽에 대한 별이의 관심이 조금씩 식어서 놀라웠다. 별이의 관심이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 ARbook 체험존이 있는데 거기에 How to raise a puppy 놀이가 있다. 그걸로 유혹하면 별이는 누워 있다가도 금방 도서관에 가겠다고 일어났다. 관장님, 감사합니다.

유치원에서 그림책 연계 놀이수업도 자주 하시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책을 별이가 이미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사람의 도움으로 별이는 도서관과 그림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에 쓰인 모든 글씨를 다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주석 하나하나까지, 그림에 쓰인 손글씨 하나하나까지도. 처음에는 추천도서 위주로 그림책을 골랐다. 하지만 엄마들의 마음은 다 같은지, 대부분 대출 중이거나 예약이 밀려 있기 일쑤였다. 지금은 추천 책의 비율은 60% 정도로 하고 나머지는 우연한 발견으로 좋은 그림책을 발굴하는 시도를 해 본다. 작은 도서관이지만 신착 도서가 꽤 자주 들어오는 편인데, 구립 도서관에 아무 책이나 들이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었다. 신착 서가를 잘 찾아보면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책이든 읽고 나서 별이와 엄마가 아름다운 의미를 만들어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서 오래 망설이지 않고 과감하게 고른다. 마음에 안 들면 다음 주에 반납하면 되는 거고 그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니까. 대체로 별이는 추천도서보다 우연히 만난 책들을 더 좋아했다.


이때부터 별이는 단순한 글자들 위주로 간판을 읽기 시작했다. 앉혀서 가르친 적 없는 단어를 읽는 것을 보면서, 억지로 가르칠 일이 아니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거구나 싶었다. 이렇게 한글 놀이는 진행 중이다. 곧 받침 있는 글자도 읽고 문장도 읽게 되겠지. 그림책을 혼자서 읽는 날도 오겠지. 엄마와 편지를 주고받을 날도 올 거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


+ 영어도 함께 갈 수 있을까?


다섯 살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 공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읽은 유아 영어 관련 책에서 아이의 영어는 즐거움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거듭해서 읽었다. 별이가 호기심과 즐거움으로부터 한글에 관심을 가지며 발전했듯이 영어도 당연히 그런 순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에서는 아이가 돌 무렵 모국어를 배우기 전부터 영어 흘려듣기를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스미도록. 물론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첫 시도: 영어 동요 흘려주기


하원 후에 배경음악처럼 틀어주었더니 별이가 완강히 거부했다. 시끄러우니 당장 끄라며, 영어가 너무 싫다며 짜증을 냈다. 마음이 힘들어졌다. 그래도 영어유치원은 다섯 살의 선택지는 아닌 듯했다. 나는 유치원의 정식 교육과정이 아이가 살아가는데 토양이 될 자질들을 가르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데 그걸 영어 하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이도 저도 못할 때 즈음에….



두 번째 시도: 페어북 읽어주기


한글책으로 이미 접한 적이 있는 원서 그림책을 몇 권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어 동요를 완강히 거부하던 아이가 내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거다. 그때에서야 알았다. 아이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보다 엄마의 목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재생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정체 모를 멜로디보다 엄마 품에 쏙 안겨 책 읽는 시간이 더 즐겁다는 것을.


그래서 목이 터질 것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내 보기로 했다.



세 번째 시도 : 동시통역(?)


잠수네 책의 페어북 리스트를 보며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위에 한글 그림책 언급할 때에 쓴 것과 같은 이유로 그 리스트에서 책을 찾는 비율을 줄이고 우연한 만남에 힘을 실어 보기로 했다. 새로운 그림책을 발굴해 보기로 한 것이다.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면 별이는 반드시 뜻을 묻기에, 그걸 내가 동시통역을 해 주어야 한다는 고충이 있었다. 글밥이 많지 않으니 크게 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나 항상 두뇌를 풀가동 시킨 상태여야 한다는 점이 힘들다. 이래서 엄마도 같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구나. 그림책에서 본 oriole, welt 같은 단어는 공부깨나 한 나도 처음 접하는 거였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히고, 딸림 자료로 있는 story song을 틀어주니 이제는 시끄럽다는 소리를 안 하고 잘 듣는다. 별이는 이제 주변 모든 것을 읽어달라고 한 후, 그건 영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묻는다. 하하….


*


자, 여기까지 해 왔다. 지금은 겨우 초입일 뿐이다. 갈 길 멀다. 꾸준함이 제일 중요할 텐데 내 체력과 정신력이 열일해주기를 바라본다. 또, 꾸준함을 위해 자주 기록하기로 다짐한다. 앞으로 별이가 어떤 성장을 이룰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최대한 낙관적으로, 아이의 속도를 존중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 보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의 성장이나 발전을 보는 건 너무 재밌다. 내일은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하고 기다린다. 별이 성장의 첫 번째 관객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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