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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n 12. 2022

삶에 질문하고 답을 찾으며 살기

[독서노트] «숲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이 책은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저자는 서울에서의 직장과 일상을 접고 가족과 함께 미국 시골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명확한 계획이나 장기적인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기적인 임금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일종의 실험을 한 것이었다. 작가의 미국 시골 이동식 주택에서의 삶은 7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그동안 작가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답을 찾아왔는지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인생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여정이지만 ‘고군분투’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 가족이 단정하게 짜여있(는 것처럼 보였)던 삶에서 예측불허의 공간으로 옮겨갔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조용히 깨닫고 애쓰지 않고 사는 삶을 산다. 작가 스스로가 초월적 인물로 비추어지고 싶지 않은 것 같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무언가에 초탈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책이다.






작가는 시골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것이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잘 짜인 자본주의 시스템 – 돈을 물건과 교환하는 – 을 적당히 활용하기로 한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기준까지만 공들여 빵을 만들고 적절한 미끼상품(?)과 함께 판매한다. 속한 사회에서 팽창한 자본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들을 기꺼이 이용한다. 경작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연을 제물 삼아 하게 되는 일임을 알게 된다. 인간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다른 것의 희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쓰려면 죄책감 없이 기쁘게 쓴다. 생산과 소비가 한 사이클 안에서 즐겁게 맞물려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원치 않은 일에 몸을 갈아 넣어 돈을 벌고 그것을 미친 듯이 소비하는 삶과는 다른 방향을 찾는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본주의를 활용한다. 새로운 시각이었다. 내게 ‘자본주의 활용법’이란 대개 돈으로 돈을 굴려 부자가 되고 일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는 삶을 얻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팽창하는 세계 경제 흐름에 탑승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되었었다.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노후에 대한 공포와 양육에 대한 부담이었다. 그 무렵 접한 어떤 재테크 커뮤니티의 부자 되기 강의 도입 영상은 ‘폐지 줍는 노인’이었다.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돈을 공부해야 한다는 거였다. 여기에 뛰어들지 않으면 자식에게도 희망찬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고 대를 이은 재앙이 될 거라고 했다. 노동을 기본으로 모으고 아끼고 연구해서 궤도에 오르면 그 후로는 돈이 돈을 낳게 된다고 했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인데도 정말로 그것만이 진실인 것으로 믿게 됐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세상 또한 그렇게 돌아갔다. 공포나 불안을 건드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마케팅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잔잔하고 성실한 삶이 좋은데, 그러려면 쉼 없이 뛰어야 한다니 슬픈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휩쓸리고 있는 동안 작가는 관점을 달리하여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것 아닌가.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외부의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찾은 것이다. 사회 속에서 살며 주어지는 ‘~해야 한다’는 명제에 의문을 갖고 지속해서 질문하는 것. 그것이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했다. 멋있다.



이것 외에도 ①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나의 해석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는 관점과 ②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주체이고 자신들만의 선택을 할 뿐, 누군가를 위한 선택이란 건 없으므로 남에게 쉬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생각, ③삶은 스스로 일구어 가는 것이지 외주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 등이 매 페이지마다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성취목표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아닐 거다. 경제적 자유를 얻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들 내 안을 채울 무언가가 없어 하루가 무료하고 권태로 가득 차게 된다면 삶은 순식간에 무의미해질 것이다. 돈이나 사회적 성공 물론 좋다. 하지만 내가 ‘나’가 아닌 ‘돈’이나 ‘타이틀’으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성취 후에도 나를 채울 수 있는 나만의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담으로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이 권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빈자리를 채울 수도 없으면서 빠른 은퇴로 몸만 편해지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성취목표로 삼는 것들을 일구어 가는 과정 전체가 나의 삶이고 그 경험치를 쌓으며 나에 대해 차근히 알게 되는 것이 사는 이유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겪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고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 돈은 편리하고 무결하며 다른 것을 쉽게 대체한다고 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할 수 있는 것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삶에 부여하는 의미들, 일상을 꾸려 나가고 설계하는 모든 일이 쉽게 돈으로 대체되기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거기 먹혀 버린다.






나는 아직 작가처럼 기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사람 같다. 내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고 길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그 길을 따라올지 아닐지는 아이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더 많이 버는 삶’을 여전히 꿈꾼다. 나는 이 길을 가겠지만 늘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에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이것이 진짜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일까? 저들이 부추기는 불안과 공포는 진짜인가? 끊임없이 질문해보아야 할 것 같다. 아이를 낳아 다음 세대를 키우고 있으니, 인간 한살이의 절반 정도는 넘어왔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에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내게 가장 옳은 길을 찾아 잘 살아가고 싶다.







+)


최근에 김애란 작가의 단편〈숲속의 작은집〉을 읽었다. 장기해외여행을 떠난 부부가 등장한다. 남편 ‘지호’는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는 인간적 예의를 큰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래서 남들은 시집 잘 간 ‘나’를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본다. 지호는 여행지 메이드에게 팁을 주면 그만이라고, 고마우면 고마운 대로 많이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인 ‘나’는 그 나라 언어로 “고맙습니다”를 정성껏 적어 쪽지를 남기고 싶어 한다. 지호는 몸을 다쳐 생활비가 필요한 장모님께 가끔 큰돈을 챙겨 드린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조끼 주머니에 봉투 없이 아무렇게나 찔러 넣어지는 큰돈이 늘 거슬린다.



‘나’는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선의, 호의나 인간적 교류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김애란 작품 특유의 우울하고 어두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심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와 인연이 닿은 현지의 어떤 여자아이가 ‘나’의 집 모양 장식품을 실수로 깨뜨린 후 비슷한 것을 사서 돌려주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나는 여기에서 ‘나’는 남편이 ‘지호’보다 현지의 여자아이와 더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성…. 김애란 작가가 썼다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단편을 읽으며《숲속의 자본주의자》를 한 번 더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둘 다 ‘숲속’이군.



〈숲속의 작은집〉은 여기에서

여행하는 소설 / 장류진, 윤고은, 기준영, 김금희, 이장욱, 김애란, 천선란 / 창비교육 / 202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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