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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정 Nov 19. 2024

그녀의 축하

-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간단한 방법


“아, 하필이면..” 

아침 일찍 확인한 임신진단기에 두 줄이 선명했다. 순간의 기쁨 뒤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꽃 같은 나의 아이가 머나먼 나라까지 나를 찾아와 주었을 때, 나는 눈부신 환영을 해주지 못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이었고, 그곳의 경기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나날이 수입은 줄어들었고, 아이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잘 살아보자고 찾아간 나라에서 우리는 깊은 불황을 견디고 있었다. 결혼 후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였지만 좋지 않은 시기에 찾아온 것이 당황스러웠다.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이 죄스럽고 슬펐다. 


그리고, 아팠다. 임신 5주인 것을 확인한 이후부터 한동안 배의 통증이 계속되었다. 말이 안 통하는 나라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응급실을 갔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이가 무사함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아이를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은 진통제에 의존하며 견뎌야 했다. 한 달간의 통증이 사라지자 입덧이 찾아왔다. 어떤 음식도 목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식욕이 사라지자 먹는 일이 곤욕스러웠다. 아이를 위해 억지로 한입씩 삼켜가면서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엄마가 되는 길은 꿈꿔왔던 것과는 달리 생소한 아픔의 연속이었다. 


선선했던 가을을 지나 더위가 시작되는 겨울의 새벽,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검사소를 찾았다. 새벽 6시의 시원한 바람은 더위에 지친 내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며 오랜만에 기분 좋은 상쾌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날은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초음파를 통해 아이의 모습을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그녀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빠라벵스, 메니나(축하해요, 딸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진심 어린 축하로 빛났다. 환한 얼굴로 몇 번이나 축하를 건넸다. 그제야 엄마가 되는 것을, 아이와 나의 만남을 제대로 축복받는 느낌이었다. 불안감과 죄책감에 짓눌려 있던 마음이 해방되는 것 같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충만한 기쁨이 그녀의 웃음과 함께 마음 깊이 흘러들어왔다.


우리를 찾아와 준 거리의 이름을 따서 “리마”라는 태명을 지어주고 아이와의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입덧의 시기가 지나니 활력이 생겼다. 내 딸이 뱃속에서 힘을 주고 있었다. 아이를 위한 최선만을 생각하자 암담한 현실에서도 길이 보였다. 우리에겐 언제든 보듬어 줄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한국으로 되돌아 올 용기가 생겼다. 임신 7개월, 빈털터리였지만 뱃속의 자랑스러운 딸이 주는 충만함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셋이 되어 돌아온 우리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 더없이 든든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난 후, 그곳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돌이켜보니 아이는 우리의 구세주였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세상을 바꾼 두더지”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땅밑에 사는 두더지의 멋진 바이올린 연주는 점점 더 멀리 퍼져 인간들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준다. 사소한 시작이 크나큰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나에게 세상을 바꾼 두더지의 연주는 그녀의 축하였다. 그녀가 건넨 축하의 말은 내 세상을 바꿨고, 내 아이의 세상을 바꿨다. 지금도 그녀의 축하를 생각하면 그날의 감동이 밀려온다. 


그림책을 읽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받은 것을 되돌려 주면 되는 것이다. 그녀가 건넨 온기가 담긴 축하처럼. 내가 따뜻하게 건네는 작은 축하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들이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바꾼 두더지처럼, 나도 누군가의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시작점이 되고 싶다. 일단 세상 모든 이의 생일을 축하해 보자.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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