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읽는 밤에

빈 나뭇가지에

by 김선정

아이와 매주 수요일 밤은 동시 읽는 밤으로 정했다. 나태주 시인의 딸로 더 유명한 나민애 교수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2시간 동안 엄마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강의를 해주셨는데 아이와 함께 시를 읽어보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남아 실행해 보기로 했다. 한때 새벽녘에 일어나 시를 읽곤 했었다. 시가 주는 위로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하루를 살아냈었다.


살만하니 시를 외면하고 있었다.


아이가 정성 들여 낭독해 주는 동시는 늘 좋다. 읽기만 해도 까르륵까르륵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같이 읽다가 문득 동시에 담긴 인생이 툭 하고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노래 같은 운율, 일상의 언어 속에 삶의 지혜를 담아내는 시인들의 재치란 얼마나 위대한지..

오늘 읽은 동시를 소개해 본다.


빈 나뭇가지에

-김구연

빈 나뭇가지에

구름 한 조각 걸렸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하얀 눈 몇 송이 앉았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뾰족뾰족 초록 잎 돋았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빨간 열매 달렸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한 마리 산새 쉬었다 가고

빈 나뭇가지에

빈 나뭇가지에.


겨울이 오면서 풍성했던 많은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빈 나뭇가지만 남아 있다. 나뭇가지가 비니 구름도, 눈송이도 앉았다 간다. 비어두니 새로운 잎도 돋고, 열매도 달린다. 비우고 나니 산새도 쉬었다 가게 되었다. 비워두어야만 오는 것들이 있다.


남편은 늘 바쁘게 움직이는 나에게 비우라고 말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비운다는 건 쉽지가 않았다. 비우면 뒤로 가기가 될 것 같은 불안함에 일시정지조차 하지 못했다. 올해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일을 찾으려다 남편의 조언을 귀담아 들어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하루, 수업이 없는 수요일은 스스로에게 쉬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나의 쉼은 독서였다.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마음을 나눴다. 그러자 마음속에 새로운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하는 지긋지긋한 질문에 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얼 잘하는지, 무슨 일이 하고 싶은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다른 아이들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들을 때마다 움츠려 들곤 했다. 마흔 중반이 넘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어진 일은 잘할 자신이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찾아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나누면서, 책을 읽고 난 생각을 글로 남기면서, 이 모든 과정을 내가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빈 나뭇가지에 싹을 틔웠으니 열매도 맺어보고 싶어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된다. 진짜 공부를 시작한다는 설렘과 동시에, 육아와 일, 학업을 병행하는 것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도 생긴다.

괜찮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 나무를 키워 보려 한다. 빈 나뭇가지에 머물다 갈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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