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서의 사랑에 대해

지각과 이해가 아닌, 존재의 여유로 사랑하는 법

by 순주씨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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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과 이해, '앎'의 피곤함에 대해

나는 이해하고 하는 사랑에 익숙하다. 외부의 자극에 예민한 편이고 주변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외부 상황과 내 내면에서 일으켜지는 감정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포착하고 분석하곤 한다.

이는 나 스스로와 다른 사람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으로부터 깊은 이해를 갈망하기도 한다.


나는 제대로, 완벽히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완전히 이해하는 순간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는 참으로 인간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깊은 이해를 갈망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꼈다.


어디까지 알아야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이해해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내 안에서 요동치는 수많은 감정의 회오리, 타인의 감정 그 하나하나를 붙잡고 해석해내야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때 맞았던 것이 지금은 아니기도 하고, 그때 일으켜진 감정이 현재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이해하고 하는 사랑은 한계가 분명하다. 먼저는 완전한 이해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없다면 사랑할 수 없다라는 오류에 빠지기가 쉽다.

이해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같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변화무쌍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시각각 에너지를 쏟아야한다. 이 얼마나 피곤한 중노동인가.


한계가 없는, 존재로서의 사랑에 대해

지각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랑이 있다면 존재로서의 사랑이다. 나는 이러한 사랑이 신의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신은 사람에게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는다.


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은 어떠한 즉각적인 대답을 해주고, 이해시켜주는 방식의 사랑이 아니다. 그저 존재하게함으로써 사랑한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어느 누구 하나 차별하지 않고 비취는 햇살, 단비, 그 햇살과 단비로 자라난 식물들. 복잡다단한 인간사보다는 분명한 자연의 알고리즘.


내가 그 원리와 법칙을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그와는 상관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는 자연. 자연은 마치 네가 사랑을 구하기 이전에, 이미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사람도 신과 자연의 방식처럼, 존재의 여유로 사랑할 수 있다. 그저 곁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여주인공의 곁을 천진난만하고 단순한 남자가 참으로 꾸준히 지킨다. 그 남자가 어린 아들을 참혹하게 잃은 젊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턱이 있겠냐마는, 그저 계속 쫄쫄 따라다니면서 여자 곁을 지킨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잘라줄 때 틈새로 비취는 비밀스러운 햇살. 밀양. 고통 속을 지날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삶의 의미와 사랑.


이해에서 존재로 관점이 전환되고 확장될 때 우리가 지닌 한계와 지각의 피곤함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했던 깊은 이해와 완전한 사랑이 이미 내가 이해하기 전부터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문득 느낄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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