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무공훈장 수여식
4월 평일 오후 1시쯤,
박경리 선생님의 생가가 있는 토지문화관에서 소설 집필에 집중하고 있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왔습니다.
“선기야, 방금 아빠한테 육군 본부라는 곳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돌아가신 너희 할아버지 무공훈장을 받으셔야 한다네?”
“무공훈장? 무슨 소리야. 친할아버지가 받으신다고?”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우리 아빠. 네 외할아버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엄마. 육군에서 전화가 왔는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한테 무공훈장을 수여한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엄마, 그거 보이스피싱이야. 그런 거에 속지 좀 마 제발.
외할아버지 무공훈장을 수여한다는 연락을 왜 아빠한테 하겠어. 말이 안 되잖아. 그 번호 차단해 그냥.”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엄마. 나 지금 글 쓰느라 바빠. 아무튼 그 번호 그냥 차단해.”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가뜩이나 시도 때도 없이 전송되어 오는 스팸 메시지와 보이스피싱 메시지 때문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지라 뵌 적도 없는 외할아버지가 육사(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의 군인이셨단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요즘처럼 개인정보 노출이 심각한 시대에 보이스피싱범들이 점점 지능화되어 간다는 생각만 스쳤습니다.
그날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가 다음 날 새벽에 깨어보니
전날 오후에 엄마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습니다.
‘육군 원사의 명함’과 ‘6.25 무공훈장 찾기 조사단 원사 정 00입니다’로 시작하는 문자를 캡처한 내역이었습니다.
“이거 진짜인가?” 싶어서 포털 사이트에 ‘6.25 무공훈장 찾기 조사단’을 검색해 봤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그런 조직이 있었고, 뉴스 기사도 여럿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진짜인 것 같다'라고 '정말 축하드린다'라고, '가문의 영광'이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뒤,
며칠 전 ‘서대문구청 인생케어과’에서 주관하는 전달식이 열렸습니다.
가족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뉴스 기사를 봤을 땐, 작은 미팅룸 같은 곳에서 소소하게 전달하는 정도의 행사였기에
별 큰 기대나 생각 없이 방문했는데
6.25(한국전쟁) 참전용사 어르신들과 서대문구청장님과
서대문구 인생케어과 전 직원분들이
무척 격식을 갖춰 준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가족을 대표해서 젊은 시절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던 어머니께서 먼저 수상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유가족을 대표해 훈장은 삼촌께서 받으셨습니다.
서대문구청장께서
70년 전, 국가에서 외할아버지께 무공훈장을 수여했던 경위를 설명해 주시고,
이어서 유족을 대표해 삼촌께서 고인에 대한 일화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육사 8기 출신으로 6.25 전쟁 발발 즉시 전쟁에 참가하셨었고,
'백마부대'의 창립 멤버로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강원도 철원지구 전투에 참가하셨었다고.
부대원 1,000명 중에 8명만 살아남을 정도로 치열했던 그 전투에서 살아남으셔서
수많은 동료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적을 죽여야 했던
그 참혹했던 기억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의 매일 술로 밤을 지새우시고
몸을 혹사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으로
1958년 중령을 끝으로 군 생활을 마치셨습니다)
참전용사이자 무공수훈자회의 회장님과 국장님께서
숙연해진 분위기에 깊이 공감하시고, 화기애애한 덕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우리 집 귀염둥이 조카도 할머니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함께 왔습니다
이 못생긴 친구는
서대문구청 인근 홍제역에서 '이사랑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제 베프인데
월요일 오전 진료가 많을 시간대인데도,
진료 시간을 미루고
축하해 주기 위해 참석해 줬습니다.
6.25 참전용사 회장님의 격려와 축하
어렵고 힘들었던 환경 속에서도 교사가 되시고
미아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신 큰 이모님(맨 왼쪽)과
오랫동안 KTX매거진 편집장을 하시고
지금은 북촌에서 '단정'이라는 이름의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막내 이모님(맨 왼쪽에서 두 번째)
축하 인사를 건네주시는 서대문구 구청장님
행사가 끝나고 담당 팀장님께 어떻게 이렇게 격식을 갖춰 잘 준비해 주신 건지 조용히 여쭙자,
구청장님께서
"의례적이고 형식적이게 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야 합니다",
라고 했다고 하시더군요.
유족의 입장에서 대단히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념사진입니다.
어머니의 더없이 환한 미소를 보자 왠지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바쁜 시간 내어 행사에 참석해 준 친구도 기념사진 한 장
혹시나 서대문구 인근에 거주하고 치과 치료가 필요하신 분은
'이사랑치과'에 방문 후
제 이름 대고 친구라고 말씀하시면,
할인도 많이 해주고 진료도 더 세심하게 해 줄 거예요...
아마도...?
구청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근처 설렁탕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인근으로 옮겨 기념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행사가 모두 끝난 다음 날,
행사 당일 마냥 행복하게만 보였던 엄마의 표정이 유달리 복잡해 보여 내가 물었습니다.
"엄마,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어. 그렇지?"
"글쎄... 마냥 그렇지만도 않네."
"왜?"
"전쟁 후에 혼자 괴로워하던 아버지도 자꾸 떠오르고,
진작 국가유공자가 되었으면 학비라던가, 취업이라던가. 혜택이 많아서
젊은 날 우리 형제들이 그렇게 고생 안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복잡하네."
"엄마, 내가 엄마를 모티프로 좋은 소설 써서
아쉽게 지나간 엄마의 청춘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볼게."
엄마에게 그렇게 말한 뒤,
나는 토지문화관에 돌아와 집필하고 있던 다른 소설들은 접어두고
어머니의 삶을 모티프로 새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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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6월 25일이네요.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지금 이 순간의 우리처럼, 다들 평화로운 일요일을 보내고 있던 그날
한반도 역사상 전례 없는 큰 피해와 희생을 남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누군가는 남침을 해 온 무자비한 북한군(중공군)을 피해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하염없이 피난길에 올랐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누군가는 갓 태어나자마자 보살핌을 받지 못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국가와 가족, 친구,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폭탄과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과연,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참전했던 모든 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