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영어교사입니다]
나는 94학번이다. 94학번은 일명 마루타 세대라고도 하고 X세대라고도 하고 비운의 세대라고도 한다. 대학을 졸업할 98년에 IMF가 터져서 그런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주관식과 영어듣기가 처음 도입되었다든지 94년도 대학입학시험부터 수능이 처음 도입되었다든지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가 우리 때에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가 수능의 도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학력고사 체제로 공부를 했다. 학력고사는 문제은행식이라 최대한 문제를 많이 풀어보고 연습하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시험제도였다. 당연히 풀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외워서라도 문제를 풀었던 나는 집요하게 공부를 해나갔다. 학력고사 문제를 반복해서 풀며 서울의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왜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진학을 목표로 잡게 되었는지 그 계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서울대학교 갈 실력은 안 된다고 판단하고 다른 대학들보다는 ○○대에 끌렸던 것 같다. 영어에 대한 동경은 중학교 시절부터 있었고 영어영문학과에 대한 동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는 셔틀버스를 운행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10시까지, 고등학교 3학년 때는 12시까지 소위 ‘야자’를 했다. 특별반이라고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에서 합숙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대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 해에 갑자기 입시제도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학력고사와는 완전히 다른 수능이 도입되고 나니, 이전과는 문제 패턴이 너무 달라져서 적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교과서 내용을 암기하느라 책을 많이 읽지 못했기 때문에 언어영역을 시간 안에 푸는 것도 힘들었다. 문과 체질이라서 공간 지각력도 떨어지고 과학적 지식도 부족했던 탓인지 수리탐구영역 문제를 푸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수학 문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유일하게 학력고사 때랑 비슷하게 점수를 유지했던 것이 영어 과목이었다. 그래서 영어과목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중학년 1학년 때 피아노를 그만둔 것을 후회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합창부 반주를 놓고 나와 베틀을 했던 초등학교 동창이 작곡을 전공할 거라는 얘기를 그즈음 들었다. 나도 피아노를 계속 배웠더라면 그 애보다 더 잘했을 텐데, 이렇게 공부하느라 머리 아프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관악부가 있었다. 클라리넷, 트럼펫 등을 입학 후 3년 동안 배워서 지역에 있는 국립대학교 음악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관악부를 모집하는 것을 알고, 엄마한테 나도 관악부에 들어가면 안 되냐고 했었다. 엄마는 그런 건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이들이나 하는 거니까,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런가 보다 하고 관악부에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하는 게 힘이 드니까 진작 관악부에 들어가서 악기를 배웠더라면 대학교에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수능 성적이 나오지 않아 괴로운 날들을 보냈다. 3월부터 모의고사 성적이 나올 때마다 거의 울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도 성적을 받고도 교실 책상에 엎드려 우는 나를 보고 참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친구들도 많았을 것 같다. 3월 모의고사 성적이나 10월 모의고사 성적이나 11월 수능 시험 성적이나 12월 수능 시험 성적이나 거의 차이가 없었다. 참 일관성 있는 내 성격이 시험 성적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보다. 우리 때는 수능을 도입한 첫 해라서 수능 시험을 일 년에 두 번 치렀다. 첫 시험은 쉬운 편이었고 두 번째 시험은 어려웠다. 첫 시험에 대박이 난 아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나는 내신은 1등급이었으나 수능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고등학교 내내 목표로 잡았던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는커녕 지역에 있는 국립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지원도 힘들게 되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과 엄마의 권유로 사범대학에 원서를 쓰게 되었다. 절대로 선생님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간의 다짐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엄마나 담임선생님은 서울에 가는 것보다는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지역 국립대학의 사범대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니 윤리교육과나 한문교육과를 가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사범대 진학까지는 동의를 했다. 하지만 원래 목표로 잡고 있던 영어를 전공하지 못하더라도 불어교육과라도 가겠다고 생각을 하고 고집을 부렸다. 영어교육과를 썼어도 충분히 합격을 했겠지만, 당시는 수능을 처음 치른 해이다 보니 각 대학 학과별 잣대가 정확하지 않아서 안전지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 입학 때까지만 해도 반 학기만 다니다가 재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갈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지만, 현실에 적응하고 즐거운 대학교 생활을 했다. 커오면서 제일 즐거운 시기를 꼽으라면 초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때까지와는 다른 여러 경험들을 할 수 있었던 대학교 생활이 참 즐거웠다.
사범대를 다니면서도 한 동안은 교사는 하지 않고, 어학 전공이니까 번역을 하던 동시통역사를 하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을 택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불어를 전공하다 보니 불어가 좋아졌고 어느덧 내 전공을 살려 불어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새롭게 다지게 되었다. 학과 성적도 좋았고 교수님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그런데 불어나 독어는 비인기 과목이라 임용에서 티오가 거의 없었다. 졸업하던 해에도 전국에서 불어교사는 단 한명도 뽑지 않았다. 막연히 불어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별 다른 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 않던 나는 일단 대학원에 진학해 시간을 번 후, 불어과 티오가 나면 그 때 시험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 후 현실의 벽은 더 크게 다가왔다. 수업은 너무나 재미있었지만, 졸업 후 취업할 길이 막막했다. 대학원을 1년간 다니면서도 용돈은 내가 벌어서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하고 장래를 위해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당시 속기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유행이었다. 마침 우리 동네에도 속기사 학원이 생겼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내가 교사가 될 수 있을까? 불어 티오도 없는데’라는 생각에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나는 한동안 속기사 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임용 티오가 날 기미가 없자 결국 휴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혼자 휴학을 결심하고 나서도 지도교수님께 막상 어떻게 말씀을 드릴까 고민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정말 잘 생각했다고 하시며 영어로라도 공부를 해서 임용에 붙는다면 교수님도 너무 기쁠 것 같다고 하셨다. 불어 전공자로서 영어로 임용을 친다고 하면 교수님께서 섭섭해 하시거나 그래도 불어를 끝까지 공부해야지라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나도 흔쾌히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셔서 정말 힘이 많이 났다. 그렇게 대학원 1년을 다닌 후 휴학을 하고 영어 임용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6개월간은 아르바이트로 초등학교 영어 보조 교사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아빠는 대학 졸업 후에는 용돈이든 학비든 모든 것을 끊은 상태였다. 아빠는 딸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 대학교 때까지는 용돈을 후하게 주셨다. 그런데 졸업하고 나니, 평소 아빠가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딱 대학교 다닐 때까지만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그 이후부터는 네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해서 그런지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스스로 먹고 살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에 영어 수업이 처음 도입되던 때라 영어 전담교사를 도울 일손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영어 보조 교사를 하면서 영어 전담 교사의 교구를 제작하기도 하고 수업에 들어가 원어민 역할을 하며 수업을 보조하기도 했다. 교과 전담실에서 따로 근무를 했던 터라 공간 시간에는 틈틈이 임용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2학기에는 아르바이트는 그만 두고 임용고시 준비에만 매달렸다. 대학교 동기들한테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도 해봤다. 다들 자신이 합격하겠나라며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결국 나 홀로 도서관 출근이 시작되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철두철미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 이상은 꼬박 공부를 했다. 아침에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두고 공부 하다가 시내에 가서 교육학 수업을 듣고, 다시 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와 공부했다. 원래 혼자 밥 먹는 걸 힘들어해서 대학교 4년간 도서관에서 공부 할 때면 항상 같이 공부할 친구부터 섭외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공부도 혼자서 밥도 혼자서였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독하게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대학교 4학년 졸업 당시만 해도 불어로 임용을 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임용 시험 유형이 어떤지 궁금해서 영어로 임용시험을 보았다. 그 때는 교육학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어 전공시험을 공부해서 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경험삼아 시험을 본 것이었다. 대학원을 1년 다니면서도 영어로 임용시험을 봤지만, 그 때도 제대로 공부하고 친 건 아니었다. 대학원 휴학 후 임용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졸업 후 바로 임용시험을 치는 것도 아니고, 비싼 등록금을 내 놓고 휴학까지 하고 준비하는 것이라 결심이 비장했다. 더 악착같이 공부했다. 임용 공부를 시작하고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할 생각밖에 못했는데, 그나마 엄마가 지원해 줄 테니 학원도 다니면서 임용 공부를 제대로 해보라고 격려해주셔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의 격려가 아니었으면 대학원을 휴학하고 영어로 임용고시를 칠 엄두도 못 냈을 것 같다. 경제적인 지원만큼이나 엄마의 지지와 격려가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운도 따라줘서 99년도에는 중등 교사 임용 티오가 확 늘었다. 영어과만 해도 총 50명을 뽑았다. 임용시험도 전례 없이 두 차례 치러졌다. 교사 수급 인원이 부족한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 교원이 부족하여, 중학교 교원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도 교육학 시험만 치면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는 제도가 일시적으로 생겼다. 학과 동기들 중 세 명은 이 때 초등교사가 되기도 했다. 나도 초등학교로 갈까라는 고민도 잠시 했지만, 어학 전공을 살리고 싶어 끝까지 중등 임용 공부를 파고들었다. 마침내 임용고시에 합격을 하여 2000년 신규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중학교 영어교사가 된 것이다.
2000년은 뉴 밀레니엄 신드롬으로 떠들썩했다. 1999년 말부터 유행했던 말이 New Millenium이었다. 2000년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그런 얘기였다. 1999년에서 2000년이 되면 컴퓨터가 2000년대를 인식하지 못해서 전산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각종 악성루머와 무시무시한 괴담이 떠돌았다. 종말론자들이 1999년 마지막 날 모두 함께 천국에 간다며 다 같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울면서 기도를 하는 모습들이 여과 없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주 옛날이야기지만 그 때는 정말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주변에 라면을 사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걱정과는 달리 2000년 1월 1일에도 태양은 떠오르고 아무 문제없이 너무나 평온하게 일상은 반복되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의 2000년이긴 했다. 마침 임용고시 2차 면접 때 영어 인터뷰 질문도 뉴 밀레니엄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임용시험은 1차에서 교육학 객관식 시험과 영어 전공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2차에서 수업지도안 작성과 수업실연 그리고 면접관과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1차 시험이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는 문제가 나오면 무조건 붙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공과목에서 공부할 내용이 너무나도 방대했다. 교육학뿐만 아니라, 전공 학원도 다녔다. 학원을 다니면서 스터디 모임을 자연스럽게 조직하게 되었다. 스터디 그룹에서 자신이 맡은 분량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부가 되었다. 영미문학 파트는 정말 공부할 것이 많았다. 운이 좋게도 공부했던 헤밍웨이 부분이 시험 문제에 나와서 아주 반가워하면서 답안을 작성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1차 시험 통과 후,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 서점에 가서 임용고시 2차 면접을 위한 자료를 찾아봤다. 지금은 사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책이 거의 없었다. 겨우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찾아서 면접에서 나올만한 질문을 예상해 보기도 하고 답변을 연습해 보기도 했다.
2차 시험 수업실연 때는 3명의 면접관 앞에서 5-10분 정도 실제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한다고 가정하고 수업을 진행해야했다. 어릴 때부터 숫기가 없고 내성적이라 생전 처음 보는 면접관 앞에서 제대로 말이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용기를 내어 면접관들이 진짜 학생인양 모션도 취해 가면서 나쁘지 않게 수업실연을 해냈다.
수업실연이 끝나고 나서는 바로 세 명의 면접관 앞에 앉았다. 면접관들이 돌아가면서 한 가지씩 질문을 던졌다. 면접관 중에 한 분은 원어민이었다. 일반적인 교직에 관한 질문이 하나, 영어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 두 가지였다. 그 중 한 가지 질문이 뉴 밀레니엄에 관한 이야기였다. 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소감에 대해 물었는지, 다짐에 대해 물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뉴 밀레니엄에 초임교사로 발령을 받는다면,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
2차 면접 때 입을 옷을 구입하기 위해 엄마랑 백화점에 간 기억이 난다. 그 옷은 20년이 다 된 지금도 옷장에 걸려 있고, 간혹 입고 출근하기도 한다. 원래 여자들이 옷을 살 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사실이지만, 당시 그 옷을 고르기까지 엄청나게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딸의 면접을 위해 제일 좋은 옷을 골라주려고 했던 엄마의 정성이 통해서였을까? 아무튼 그런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선생님이 되었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내가 드디어 영어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정말 의미 있는 새천년의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긍정의 힘으로 교직을 디자인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