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영어교사입니다]
나는 영어교사이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신규교사 시절에는 영어 교과서 내용을 학생들이 완전히 이해하고 머릿속에 넣게 하는 것이 영어교사로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교과서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이 끝난 후에는 학생들이 배운 표현들을 익힐 수 있도록 복습을 열심히 시켰다. 단순히 익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암기하도록 했다. 교과서에 실린 읽기 자료 내용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암기하는 미션을 내곤 했다. 외우지 못하면 방과 후에 남아서라도 내용을 다 외우고 가야했다. 암기 미션을 힘들어 하는 학생들이 한 반에 한 두 명은 꼭 있었다. 8시,9시까지 학교에 남아 그런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학생들은 힘들어하면서도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하니 성적이 오른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반에 특수반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이 학생은 항상 반에서 혼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이었다. 지금 같으면 그런 학생은 열외를 시키고 미션에서 제외시킬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의욕이 넘치는 신규였던지라 한 명도 빠짐없이 미션을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다행히 이 학생도 나의 지도를 잘 따라주었다. 암기 테스트가 있는 날이면 능숙하게 읽기 자료를 암송하여 반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 학생은 매번 미션을 완수하면서 영어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많이 올라갔다. 오죽하면 자신의 꿈이 영어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고 했을까! 그만큼 그 학생에게는 영어 암송을 해냈다는 경험이 자존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학생이 본문 암기를 통해 10문장, 20문장, 100문장을 암송했다는 사실보다는, 이 학생이 그런 과정을 통해 영어를 좋아하게 되고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영어 문장을 많이 외우는 습관이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영어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부하면서 영어에 최대한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는 것, 귀찮지만 외워야 한다는 것, 꾸준히 하다보면 발전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내 수업 방식에 학생들은 괴로웠을 수도 있지만, 학부모들은 내 영어 지도 방식을 좋아했다. 중학생들은 이미 사춘기라서 집에서 엄마가 공부하라고 하면 잔소리로 듣고 제대로 말도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를 붙들어 공부를 시키고, 영어 문장을 입으로 술술 외우게 하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영어수업을 담당했던 학생들을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으로 만나게 된 적이 있다. 학생들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선생님~, 저희 엄마가 선생님이 담임이 돼서 잘됐대요. 너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라고 하셨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싫지는 않았다.
신규 때부터 내가 만든 학습지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며 첫 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내가 남기고 간 학습지를 영어과 교사들이 계속 활용할 정도였다. 심지어 같은 학교에 근무를 하다가 다른 학교로 옮긴 선생님이, ‘선생님, 어느 출판사 교과서 써요? 선생님 학습지를 좀 받고 싶어요’라고 전화가 온 적도 있다.
두 번째 발령 받은 학교에서는 가르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 1학년 학생들 중에는 외국 연수를 다녀온 아이들도 많았고, 외국에서 1년 이상 체류하다 온 학생들도 한 반에 여러 명이었다. 이 때는 교과서 내용을 가르치고 암기하게 하는 것도 병행했지만,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영어 표현을 잘 활용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교과서 내용 외에 다양한 읽기 자료를 제공하여 학생들이 실제적인 영어표현에 많이 노출되도록 했다.
첫 학교에서 가르친 한 남학생을 그즈음 만났다. 이 학생은 소위 말하는 영어 부진 학생이었다. 정규 수업시간에도 부진반 수업에서도 항상 뒤처지는 학생이었다. 읽기 자료 암기 미션을 수행하지 못해 저녁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중학교 졸업 후 인근에 있는 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누군가 반갑게 ‘선생님~’하고 부르면서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잘생기고 훤칠한 청년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가르쳤던 학생인 것이 기억이 났다. 이 학생의 모습에 놀랐다. 키는 훌쩍 자라 있었고 얼굴은 예전에 비해 하얘지고 표정도 많이 밝아져 있었다. 이후 이 학생의 친구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학교에서 킹카라고 불리며 학교생활을 즐겁게 잘하고 있다고 했다. 이 학생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먼저 영어를 못한다고 그렇게나 구박(?)을 많이 했는데 반갑게 뛰어와서 인사하는 그 학생이 너무 고마웠다. 영어를 못한다고 구박한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잘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따로 남겨서 공부를 시킨 진심을 그 학생이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자신의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를 강조해 왔는지 회의가 들었다. 이 경험은 모든 학생들이 영어를 꼭 잘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은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2010년 복직한 학교는 학업성취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비율도 낮았다. 수업시간에 제대로 교과서 내용을 전달하지 않으면 방과 후나 집에서 따로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 후에는 교과서 내용을 복습하도록 했다. 가정 형편상 학생들을 돌봐주지 못하는 집들이 많아서 담임교사나 교과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심지어 영어 교사인 내가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수학을 지도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옆에서 신경을 써 줬으면 학습부진아가 되지는 않았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학생들이 많았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엄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야단을 치고 필요하면 때리기도 했다.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신규교사 때는 학생들이 나를 만만하게 대할까봐, 웃고 친절한 이미지보다는 어떻게 하면 무섭게 보일까를 늘 생각했다. 잘 웃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엄하게만 대했던 것 같다. 첫 학교 마지막 해에 이웃 학교로 발령이 난 것을 알고 한 학생이, ‘선생님~, 그 학교 학생들은 우리와는 달라요. 거기 가서는 절대로 웃으시면 안돼요. 절대로 웃지 마세요’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뇌리에 박혀서 그런지 두 번째 학교에서는 더 웃지 않았던 것 같다. 두 번째 학교로 옮긴 바로 그 해 5월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달라진 생활 패턴에 학교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것에 적응이 필요한 시기였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영어교사는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영어 말고도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 많다. 담임업무는 차치 하고서라도 교과 시간에도 영어 지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협업능력,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 의사소통 능력, 자기주도 학습능력 등 학생들에게 키워줘야 할 역량들이 많이 있다. 2014년부터 한동안은 교과지식보다는 이런 역량을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영어지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다. 2016년부터는 PBL 실천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프로젝트 수업을 적용하게 되었다. PBL을 적용하면서 이것이 과연 영어 수업인가라고 생각될 정도의 주제도 있었다. 실제로 이런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과연 모든 학생들이 영어를 잘해야 할까?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역량이 제대로 길러질까? 이런 프로젝트 상황에서 영어를 꼭 써야 하는지 등 생각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흔히 영어 교과의 목표를 영어로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4 Skills)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영어과 교육목표를 보면 문화이해나 의사소통도 강조되고 있다. 2015 개정교육과정의 중학교 영어의 목적을 살펴보면, “중학교 영어는 초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토대로 학습자들이 기본적인 일상 영어를 이해하고 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고등학교의 선택 교육과정 이수에 필요한 기본 영어 능력을 배양시키는 데 역점을 둔다. 중학생의 인지적, 정의적 특성에 부합하는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을 활용하여 영어 의사소통능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영어 학습과 언어 이해, 습득, 활용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문화 학습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영어학습의 효율성을 꾀할 뿐만 아니라 외국의 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및 글로벌 시민 의식을 함께 기르고, 우리 문화를 외국인에게 소개할 수 있는 의사소통능력 배양을 유도한다.”라고 되어 있다. 영어교사로서 어떤 지식과 역량을 학생들에게 길러주어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지만,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살아갈 힘을 길러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영어는 도구교과이다. 어떤 원리나 이론을 깊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영어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 자체가 영어수업의 하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영어 과목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배우고 있는 이 내용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해서 인 것 같다. 영어가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신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미래에 좋은 직업을 구하기 위해 지금은 참고 공부해야 하는 거야’가 아니라, 지금 당장 현재의 자신의 삶에 활용하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주고 싶다. 영어를 단순히 책으로만 배우고 익히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교과목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하고 영어에 대한 성취감과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영어교사로서의 목표 중 하나이다.
-<긍정의 힘으로 교직을 디자인하라>(2019.2.2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