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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l 18. 2022

직업으로서의 변호사

적성에는 맞는 것 같고, 지향점에는 안 맞는 것 같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내 정체성 3가지를 꼽아보라고 하여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았는데, 나의 정체성 1순위는 내 직업인 변호사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내 직업에 쏟고 있다.


나는 12년차 법조인이다. 4년 정도는 검사였고, 8년 정도는 변호사였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좋은 점도 많고, 힘들고 싫은 점도 많다. 만약 내 아이들이 커서 검사나 변호사가 되길 바라냐는 질문에 대해서 내 대답은 언제나 '절대 아니'일 정도로, 나는 법조인의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해 후회를 많이 했고, 다시 19살로 돌아간다면 법대가 아닌 어떤 전공을 골랐어야 하는지, 지금이라도 직업을 바꾼다면 어떤 직업이 내게 맞을지 공상도 많이 했다.


내가 생각하는 변호사로서의 가장 힘든 점은 '내가 하는 업무의 결과가 의뢰인의 인생에 구체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음주운전을 했는데 집행유예가 나오면 취업규칙상 직업을 잃게 되어 반드시 벌금을 받아야 하는 의뢰인, 진단서 관련 범죄가 문제되었는데 집행유예를 받으면 의사 면허가 취소되어 반드시 벌금을 받아야 하는 의뢰인, 혐의는 인정하는데 실형인지 집행유예인지 기로에 선 의뢰인, 사실혼 관계가 끝났는데 재산이 모두 상대방 명의로 되어 있어서 한푼도 받지 못해 소송을 제기한 의뢰인, 가정폭력으로 이혼과 위자료를 청구했는데, 상대방이 쌍방폭행이라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역으로 형사고소를 해와 처벌 위기에 처한 의뢰인 등등. (사무실에 있지 않을 때도 불쑥불쑥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건들이다. 더 많지만 생략했다..)


내가 업무를 제대로 해서 결과가 좋게 나오면 의뢰인의 위기상황은 해소되고 직업도 유지하고 사회와의 격리 없이 가족과 생활할 수 있고 재정적으로 여유롭게 되고 의뢰인들은 감사해하고 나는 기분이 무척 좋고 뿌듯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신없는 와중에 뭔가를 놓쳐서, 상황판단을 잘못해서, 이런저런 일로 중간에 성실하지 못한 순간이 있어서, 그것도 아니면 내 업무 능력이 부족해서 등 갖가지 이유로 나쁜 결론이 나오면 의뢰인은 직업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거나 명예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래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최종 판단자는 아니기에 과정에서라도 최선을 다한다. 이제 좀 편하게 쉬엄쉬엄 하고 싶어도, 내 업무의 결과가 의뢰인의 삶에 미칠 구체적이고도 중대한 영향을 생각하면 편해지지가 않는다.


나는 변호사이기 이전에 8살 6살 두 아이의 엄마고, 엄마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자아도 챙기고 싶기 때문에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변호사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필수이고, 가끔은 나 혼자 보낼 시간도 있어야 자아가 붕괴되지 않는다(극강의 개인주의자여서 그렇다). 근데 의뢰인들은 업무 외의 시간에도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많고(그들도 업무시간에는 업무를 해야 할테니) 특히 메일은 당장의 회신을 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무 때나 메일을 보낸다. 일부러 야간과 주말에는 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지만, 그건 그거대로 마음이 불편하고 뭔가 놓칠까 싶어 불안하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나중에 내 자식들은 1> 고객이 힘들 때 찾는 직업이 아닌 즐겁거나 행복할 때 찾는 직업, 2> 업무시간과 일상이 딱 분리될 수 있는 직업, 야근을 할지언정 일단 퇴근을 하면 회사나 업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갖길 바라고 있다. 그런 직업이 드물다는 것은 잘 안다. 만약 그런 직업을 쉽게 가질 수 있었다면 아이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기 전에 내가 전직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변호사이기에 가능한, 일반적인 직업과 다른 측면에서 좋은 점들도 있다. 우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아주 많이 넓어진다. 개인이 혼자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사고, 다양한 인간관계와 감정, 경제적 이해관계를 아주 구체적인 증거와 살아있는 진술로 접할 수 있다.


살면서 '타인들이 주고받은 각종(불륜, 뇌물, 부부사이, 고부관계, 연인사이, 친구관계, 업무관계 등 진짜 각종) 카카오톡'을 날것 그대로 접할 일은 거의 없다. 정말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도 어떤 사건을 얘기할 때는 내 기준에서 편집한 버전으로 말하지 각종 카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진 않는다. (그러면 그 친구나 가족은 진저리치며 도망갈 것이므로) 그러나 변호사는 의뢰인의 버전으로 편집된 진술을 뒷받침할 객관적 증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각종 카톡이나 문자를 있는 그대로 전달받아 검토한다. 나는 극강의 개인주의자로서 감정변화도 별로 없는 편이어서 공감능력이 부족했는데, 변호사 업무를 통해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고, 사람의 다양한 사고방식, 여러 인간군상을 접하면서 어설프게 관상을 알아보는 능력도 생겼다. 타인에게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직접 대면해서 어느정도 대화를 해보면 말투나 표정, 말의 내용과 거기서 드러나는 사고의 흐름 등으로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로펌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개인 의뢰인보다 회사가 의뢰인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만약 내가 변호사가 아닌 한 회사에 소속된 회사원이었다면 그 회사의 일만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변호사로서 여러 회사의 일을 받아서 했기 때문에 은행이 어떻게 채용비리를 했는지, 재벌기업이 어떻게 뇌물을 주게 되었는지, 프랜차이즈 본사는 어떤 폭리를 취하는지, 제약회사는 어떤 방식으로 리베이트를 주는지, 각 재벌기업의 특유한 문화는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신문이나 책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살아있는 사회였고, 로펌 재직 시절에 격무를 버틸 수 있었던(가끔은 즐기기도 했던)계기였다.


이렇게 각종 사건사고를 업무로 접하면서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나는 더 이상 소설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일들이 매일매일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여가시간에 또 소설을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마스다 미리 류의 심심하고 잔잔한 에세이를 즐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변호사로의 특장점은 (단점과도 맞닿아 있는데) 의뢰인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고, 실제 도움이 되었을 때 의뢰인으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를 받고, 기분도 너무 좋고, 성취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타인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 때 스스로 느끼는 행복감, 고취감이 크다고 다. 근데 변호사는 사소한 도움이 아니라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다.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거나 잘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너무 뿌듯하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 때문에 마흔이 다 되도록 '변호사가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아. 내 천성에 더 잘맞는 천직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라는 적성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도 변호사 일을 놓지 못하고, 때로는 괴롭지만 꽤나 즐겁게, 하려고 했던 것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다.


20년 지기 내 남편의 평가대로, 나는 꽤나 변호사가 적성인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어딘가에 이보다 나에게 더 꼭 맞는 천직인 직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바람 내지 공상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80세 인생, 인생 2모작 내지 3모작이라던데, 나도 머지않아 두 번째 직업을 갖고 싶다. 두 번째 직업은 내 게으른 천성에 맞는 일이면 좋겠다.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집중해서 일해도 되면 좋겠다. 일하는 장소에 제약이 없어서 도시가 아닌 곳에서 살면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논리 싸움이 아닌 인간의 마음이나 오감을 만족시켜서 대가를 받는 일이면 좋겠다. 타인의 삶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소소한 이면 좋겠다. 직업에 대한 내 소망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아야 두 번째 직업에 한발짝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안 그러면 정말로 평생 이 직업을 계속해야만 할 것 같아서(정년도 없는 직업이다..), 19살 때는 멋모르고 수능점수와 엄마의 소망에 맞춰 학과를 골랐지만 39살에는 나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직업을 고르는 게 맞으니까, 그런 이유들로 나에 대해 알기 위해,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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