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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n 19. 2023

여름 살구의 맛

안 해봤던 것 해보기

어릴 때부터 신맛을 싫어했다.

귤은 손도 안 댔고, 사과도 신맛이 돌아 멀리했다.

구르트도 잘 안 먹을 정도였다.

나이가 들면서 사과는 잘 먹고, 귤도 가끔은 먹게 되었지만, 자두, 살구 같은 신맛 나는(날 것 같은) 과일은 우리 집 구매주체인 내가 사지를 않으니 좀처럼 먹을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엊그제 살구를 한 봉지 얻게 되었다.

같은 동네 독서모임 회원분과 아이 학원 하원 시간이 같아서 정기적으로 마주치는데, 과수원을 하는 친정에서 약을 치지 않고 기른 살구라며 나눠주셨다.


살구를 나눠주실 때, 나에게 "살구 드세요~?"라고 물어보셨는데, 거짓말을 못하는 내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던 것 같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먹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더니, 챙겨 온 두 봉지 중 한 봉지만 건네주셨다. 자두는 어릴 때 몇 번 먹어봤는데(먹다 셔서 뱉었다), 살구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걸 이 문답으로 깨달았다.


부모님께서 약을 치지 않고 직접 기른 살구는 귀하다.

그리고 나는 살구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이참에 한 번 먹어보기로 한다. 게다가 우리 집에는 과일을 잘 먹는 아이들이 두 명이나 있으니 살구 몇 알 정도는 버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용기를 내서 맛본 살구는 뜻밖에도 굉장히 맛있었다.

복숭아보다 맛이 진하고, 과육이 연했다.

딸이 살구맛을 알아보고 자꾸 더 달라고 해서 이틀 만에 몇 알 남지 않게 되었다.


살구는 맛이 진해서 아침빵에 곁들여 토스트로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말 아침산책 후 베이글을 사와 반으로 자르고, 크림치즈를 살짝 바르고, 얇게 썬 살구를 올리고, 호두를 얹고, 꿀을 끼얹었다. 한입 베어무니 상큼하고 달콤하고 고소하다. 입안에서 여름축제가 벌어진 듯 진한 맛이었다. 곁들인 커피와 아주 잘 어울리는 맛이 풍성한 여름메뉴였다.


토스트를 먹으며 살구를 나눠주신 이웃에게 카톡으로 살구맛 후기와 함께 감사인사를 전했다. 원래 두 봉지를 챙겨 오셨다가 내 반응을 보고 한 봉지만 주셨다는 것, 다 먹으면 더 줄 수 있을 정도로 친정에서 많은 살구를 받았다는 것을 그때 들었다.


그리고 딸과 내가 주말 동안 살구 한 봉지를 다 먹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기로 했다. 평소의 나라면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폐가 될까봐 절대로 보내지 않았을 메시지, "살구가 아직 남아있는지, 조금 더 얻을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살구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며 아이 하원시간에 좀 더 주시겠다고 한다.

 

실 것 같다는 선입견과 거리감에 이제껏 단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과일을 용기 내어 맛보고, 내가 스로 세운 벽을 넘어 이웃에게 먼저 청을 한 덕분에 귀하고 맛있는 살구를 한 봉지 더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풍성하고 진한 여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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