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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Nov 04. 2022

<버지스 형제>

마음이 차가워지려고 할 때 읽어보세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온다. 이 작가를 좋아할 이유 한 가지를 더 추가하게 될지, 혹은 실망하게 될 이유 한 가지를 찾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런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어떤 책을 시작하든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안도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분명히 좋은 감정을 발견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의 책을 매우 아껴서 읽는다. 한 번에 다 읽지 않고 시간을 두고 읽는다. 살다 보면 종종 마음이 팍팍해지는데, 그럴 때마다 아직 읽을 이 작가의 책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버지스 형제>는 버지스 가족의 이야기다. 첫째인 짐과 둘째인 밥, 막내인 수전의 이야기다. 셋은 각자 정말 다르고 우리는 형제가 그토록 다르다는 걸 살면서 익숙하게 알고 있다. 다르지만 사이가 좋은 형제도 있고 달라서 서로 남처럼 사는 형제도 있다. 버지스 형제들은 약간 어중간한 축이다. 멀리서 보면 멀쩡하게 보이는 그들의 이야기는-누구나 멀리서 보면 그렇다, 사실- 한 꺼풀 벗겨내면 사연이 많다. 그 사연을 읽는 것이 위안이 된다. 


   짐은 평생 어릴 적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거짓말까지 한 죄책감은 안고 산다. 그 잘못을 동생 밥에게 뒤집어씌운 것까지 모두. 그런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 동생들에게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한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한이 없고, 헬렌에게서 그 욕구를 충족시킨다. 조금은 위축된 상태로. 짐에게 헬렌은 엄마 같은 존재다. 
    밥은 아버지를 죽게 한 아이라는 멍에를 안고 살지만 타인에게 언제나 다정하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고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팸과의 결혼 생활이 끝나게 된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타인의 욕망은 예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랄까. 

   수전은 어머니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고 자라서 매사에 부정적이고 어두운 사람이다. 남편이 자신을 떠난 이유도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들 잭이 사건을 일으킨 이유도 자신에게서 찾는다. 잭의 외로움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끔찍하게 아들을 사랑한다. 


   이야기의 중심 사건은 수전의 아들 잭이 모스크에 돼지머리를 던져 넣은 것이다.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세 형제는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인 소말리족이 등장하게 된다. 소말리족 압디카림은 자신이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잭을 도와준다. 조상들과 전통이 중요한 소말리족 입장에서는 미국의 가족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마음을 열게 된 것은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186. 아마도 그녀는 사람을 안다는 게 프리즘을 보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모든 차이와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작가. 작가는 정말 절실하게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가 너무 광대해서 가까워지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 162. 그는 도시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느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도 그들 중 하나였다. 아무리 어둠이 새어들어와도 이곳에는 늘 불 켜진 창문들이 있었고, 각각의 불빛은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밥 버지스,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 외로움의 표피를 걷어내고 나면 타인과 만나고 싶은 갈망이 숨어있다는 걸 안다. 만남의 첫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는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외로움을 털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삶에 대한 이런 통찰력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희망을 말한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자고 소곤거리는 것 같다. 


 - 517. 밥은 지하철에 탄 사람들 모두가 순수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눈동자는 그들만 알고 있을 아침의 몽상 때문에, 어쩌면 전에 들은 말 때문에, 혹은 그들이 하려고 꿈꾸는 말 때문에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 그는 자신이 본 사람들 각각의 개성과 신비로움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 소설에서 특별한 점은 프롤로그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등장해서 버지스네 가족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마저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그런 뒤에 에필로그는 필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는데 맺음말이 왜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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