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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23. 2023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을 때

   작가들에게는 문학의 의미 자체가 인생의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다. 자신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모든 가치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인데, 문학 역시 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 변화의 폭이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없던 시절에 문학은 인간의 삶에 즐거움과 가치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가 보편화된 시절에도 문학의 의미는 금방 빛이 바래지 않았는데,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모두 다 정교하게 구현해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상상하는 모든 것을 영상으로 구현해 낼 수 있고 상상 이상을 보여주는 시대에 도대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작가가 새로 탄생되고 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등장하기 힘든 이런 시대에 작가들은 엘리만과 같은 신화적 존재를 꿈꾸게 되지 않을까.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와 같은 신비롭고 신화적인 텍스트 혹은 적어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작품 하나를 남기고 싶지 않을까. 디에간은 작가의 대리자이지 화자인데, 작가는 아마도 엘리만 혹은 디에간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아니, 엘리만과 디에간이 동시에 되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볼라뇨 소설을 오마주한 것처럼 엘리만이 기존의 신화나 작품들을 짜깁기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이제 문학 안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기존의 것을 가져와서 재해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동시에 문학의 효용 혹은 역할 중 다른 하나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그것 또한 놓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고 말하고 싶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사실 이 한 권에 다 담기에는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넘쳐흐르고 있다.


   대체로 우리는 과잉보다는 모자람을 더 선호한다. 과잉에서는 독자를 지나치게 배려해서 오히려 독자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모자람 속에서는 여백을 채우고 싶은 독자의 욕망도 생겨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문학에서는 어쩌면 정제된 형식과 언어로 말해야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괜찮은 문장은 많다.

15쪽. 한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작가와 그의 작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미로를, 목적지와 출발지가 구별되지 않는 긴 순환로를 함께 걷는다. 그 길은 바로 고독이다. 

76쪽. 말하는 것 역시 살아 있게 만드는 한 가지 방식이니까. 문학이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아무리 무용하고 아무리 비극적인 희극이고 무의미할지언정 그래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 아닐 수 있지. 

201쪽.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결코 떨쳐내지 못한다. 영원히 그 이야기에 묶여 있다. 

333쪽. 나는 늘 한 작가가 세상에 내놓는 한 권의 책은 거기까지 오기 위해 없애버린 모든 책의 총합이라고, 혹은 쓰지 않고 버틴 책들의 결과라고 믿었다. 

496쪽. 너도 알다시피 식민지화는 피식민자들에게 황폐와 죽음과 혼돈을 심어.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건-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거야. 엘리만이 그랬어. 소외의 슬픔이지. 

526쪽. 어쩌면 문학 속에는 아무것도 찾을 게 없을지 모른다. 문학은 시커멓게 반짝이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할 수 없는 관과 같다. 그 관 안에 시신조차 없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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